여러분이 교회 모임을 가질 때에 여러분 가운데에 분열이 있다는 말이 들리는데,
여러분이 한데 모여서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오늘 서간에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회에 분열이 있음을 지적하며 꾸짖는데
여기서 분열은 앞서 3장에서 아폴로 파니 바오로 파니 하는 그런 분열이 아니라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과의 차별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당시 교회는 주님의 성찬례를 거행하기 전에 각자 음식을 싸 가지고 와
같이 나누는 전통이 있었는데 두 가지 볼썽사나운 모습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는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이 일하느라 늦게 오는 것을 기다려주지 않고
자기들끼리 먼저 먹은 것과 다른 하나는 부자들은 잘 싸 와서 맛있게 그리고
배불리 먹고 가난한 사람들은 굶거나 변변한 음식이 아니어서 밖에서 초라하게
먹은 것인데 결과적으로 부자들과 가난한 이들의 모임이 따로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부자들의 만찬은 주님의 만찬과 다르다며 그럴 바에는
각자 집에서 먹고 올 일이지 왜 굳이 부자들끼리만 음식과 친교를 나눔으로써
주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느냐고 꾸짖는 겁니다.
여기서 바오로 사도는 부자들의 끼리끼리 만찬이 가난한 사람들만 부끄럽게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교회를 업신여긴” 것이라고까지 합니다.
주님의 만찬을 나누는 주님의 교회라면 절대로 이런 차별이 있을 수 없는데,
그것은 인간적인 차별일 뿐 아니라 신앙적으로도 차별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주님 만찬의 정신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첫째는 가난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내게 해준 것이라는 주님 말씀대로
가난한 사람과 주님을 동일시해야 하고, 나중에 바오로 사도가 더 자세하게
얘기하겠지만, 같은 주님의 몸과 피를 나누듯 음식을 나눠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회적인 차별이 교회 안에 그대로 있다면
그 교회를 어떻게 주님의 교회라고 할 수 있고
나눔이 없는 만찬을 어떻게 주님의 만찬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가 아니면,
아니, 가난한 사람들의 교회가 아니면 주님의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 안에서 존경과 사랑을 받을 때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일 때였습니다.
그때 우리 교회 안에는 ’가난한 자의 우선 선택‘이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에게 뭣을 좀 주는 사회 복지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교회의 한 구성원이며 중심으로 여기는 그런 차원이었지요.
가난한 사람을 우선 선택한다는 말은 부자를 배제한다는 뜻이 아니라
말 그대로 가난한 이들을 먼저 선택한다는 뜻이고,
그것은 부자들은 ’우선 선택‘하지 않아도 교회에 떳떳하게 나오지만
가난한 이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고,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강론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밖에서는 청소차가 와서 쓰레기를 치우는데
시끄럽다고 아무 생각 없이 창문을 닫으려다가 이것도 듣기 싫은 소리 밀어내고,
맡기 싫은 냄새 피함으로써 그들을 밀어내는 것이라는 생각에
창문을 닫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종의 그분들을 받아들이는 예식을 하였습니다.
불교에서는 구별심만으로도 불행하다고 하는데
차별심까지 있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한다면 그것은
형제적 사랑을 얘기하는 그리스도교인과 프란치스칸으로서
오히려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하고 자신을 크게 꾸짖어야 할 일입니다.
나는,
우리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인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