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기 자신을 버리고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오늘의 독서 신명기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인데
이렇게 선택이 요구되면 우리는 생명과 행복을 선택할 것이고,
선택의 어려움이 없기에 머뭇거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생명과 행복을 얻으려면
자기를 버려야 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하며,
예수님을 따라 자기 목숨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고,
자기 목숨을 버려야 얻을 수 있는 목숨, 생명이기에
선택하기가 어려워 머뭇거리게 되고
선택을 미루거나 아예 선택을 아니 하게도 됩니다.
그런데 오늘의 신명기와 복음의 주님은 선택을 하라고 압박을 하십니다.
적극적으로 생명을 선택하지 않으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번 제 삶을 진지하게 성찰해봅니다.
나는 진정 내가 나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혹시 살아지는 삶을 그저 사는 것은 아닐까?
하루가 주어졌으니 그저 사는 것은 아닐까?
선택이 없으니 생각 없이 살게 되지 않던가요?
그런데 만일 내가 매일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처럼
매일 오늘 살 것인가 말 것인가를 선택한다면,
또는 시한부 인생처럼 하루하루를 죽음 앞에서 산다면
우리는 매일같이 새로운 삶을 삶답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저나 그분이나 둘 다 양성을 받을 때입니다.
그 수사님은 수도원 들어올 때 가지고 온 가방을 한동안 풀지 않았습니다.
매일 떠날 것인가 살 것인가를 그 가방을 보며 선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잘못 살면 언제고 바로 수도원을 떠나겠다고 배수의 진을 친 것이지요.
죽음은 삶의 끝장이나 마지막이 아니라
참 삶을 견인하기 위한 위대한 선택이고
십자가는 져야 할 무거운 짐이 아니라
참 사랑을 살아가게 하는 선택임을 오늘 주님은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50대 초반까지 자기 전 옷과 주변 정리를 하고 잤는데 고혈압으로 밤새 갈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
지금은 오히려 내일 걱정을 더 하고 있으니, 참 잘못 살고 있는것 같습니다.
회개의 때 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