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신 이야기는
공관 복음서 세 곳에 모두 나옵니다.
그러나 오늘 들은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 표현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뽑으시기 전에
산에 올라가셔서 밤새 기도하십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사람들을 뽑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을 뽑으시기 위해서
하느님의 뜻을 여쭈어 보십니다.
하느님의 뜻까지 여쭈어 보고 뽑은 사도들인데
그 안에 유다 이스카리옷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의외의 일입니다.
우리가 언뜻 생각하기에
내가 하느님이라면,
하느님께서 정말 모든 것을 다 아신다면,
유다만큼은 제외시키실 것 같은데,
하느님의 뜻에 따라 뽑은 사도들 가운데에
유다가 속해있습니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부분입니다.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여쭈어 봅니다.
물론 기도 속에는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갈망도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의 기도처럼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결과가
생기는 하느님의 뜻이라면,
결과가 나타나기 전에는 괜찮겠지만,
결과가 나오고 나서는
하느님께 원망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과연
유다가 배신자가 될 것을 아시면서도
유다를 사도로 뽑으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실 때
모두에게 똑같이 치유와 구마의 권한을 주십니다.
그것은 유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하느님도 예수님도
유다를 여느 사도들과 똑같이 대하십니다.
그렇다면 배신자가 된 것은
유다의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여쭈어 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내가 원하는 것도 봅니다.
기도가 대화라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을 놓고
어떤 것을 선택할지
하느님과 의논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기에
당신의 뜻을 무조건 강요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런 대화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이 무엇인지
찾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간이 지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에 머무를 때
하느님의 뜻에서도 멀리 떨어지지 않고
우리의 뜻도 하느님 안에서
좋은 방향을 찾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