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편이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합니다.”
두 가지 부러움
오늘 바오로 사도는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다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고 하며
자기의 진정한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며 이런 바오로 사도가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부럽다는 것은 나는 그러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는 다시 저 자신을 성찰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나의 바람이 아닌가?
그럴 리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저의 바람 맞습니다.
그렇다면 왜 부럽고 무엇이 부러운 것입니까?
부러워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바오로 사도가 부럽다면
그것은 이 세상을 떠나는 그 차원일 것이고,
제가 미련 없이 또 기꺼이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는지
지금이라도 당장 떠날 수 있는지 그 차원일 것입니다.
결국은 믿음과 사랑의 차이이고,
바오로 사도의 믿음과 사랑이 부러운 것입니다.
저도 지금 생각에는 주님께서 부르시면 미련 없이 이 세상을 떠날 것 같지만
그 상황이 되면 실제로 그럴 수 있을지 자신이랄까 확신이 부족한 반면
오늘 바오로 사도는 확신이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차이는 사랑의 차이입니다.
정말로 주님을 사랑하면 그리고 사랑하면 할수록 주님께 가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일 것이고 그래서 그 길에 두려움이나 미련은 없을 겁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면에서 주님을 정말로 사랑하는 데 비해
저는 이 세상에 대한 미련만큼 주님을 덜 사랑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오로 사도의 주님 사랑에 대한 부러움이라면
또 하나의 부러움은 이웃 사랑에 대한 부러움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다른 데서도 이웃 사랑의 높은 경지를 토로한 적이 있지요.
동족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그리스도와 떨어지는 불행,
곧 지옥에 가는 것도 감수하겠다고 말입니다.
저도 이웃 사랑을 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의 사랑과 결이 다르고 차원이 다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의 불행을 감수할 정도로 이웃을 사랑합니다.
저는 하느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차원,
다시 말해서 인간적인 사랑에 많이 머물면서
하느님 사랑에로 올라가려고 하는 애를 쓰는 차원이고,
그래서 이웃을 위해 고통을 좀 감수할지는 몰라도
불행을 감수할 정도로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
바오로 사도로부터 자극도 받고 도전도 받는 오늘 저이고
아마 여러분도 같은 자극과 도전을 받는 오늘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