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대림절 첫 복음으로 백인대장의 종을 주님께서 치유해주신 얘기를 택했고,
복음 환호성은 “주 하느님, 어서 오시어 저희를 구원하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입니다.
이 복음 환호성에 비추어 오늘 복음을 보면
백인대장은 주님께서 어서 오시어 구원해주시기를 바라고,
그래서 마침내 구원을 받는 대림 시기 우리의 모범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셨고,
오늘 복음에서는 가파르나움까지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고, 가파르나움까지 찾아오신 것은
오시기를 당시 백인대장이나 지금의 우리가 바랐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라고 청하지 않아도 주님은 오실 분이라는 말입니다.
엄마는 꼭 와달라고 해야 집 떠나있는 자식을 찾아가는 분이 아닙니다.
청하지 않아도 그리고 청하기도 전에 찾아가시는데 주님도 그러십니다.
오늘 주님께서도 종이 아프다는 백인대장의 말에 청하기도 전에
“내가 가서 그를 고쳐 주마!”하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우리가 주님 오시기를 바라고, 초대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은
그러지 않으면 안 오시기 때문이 아니라 그래야 구원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바라야 하는 이유는 바라지 않는 우리가 되어서는 아니 되기 때문입니다.
초대하고 기다려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라지도 청하지도 기다리지도 않는데 주님이 오시면
우리는 주님께서 오셨는지도 모를 것이고,
알더라도 주님을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청하지 않고, 청하기도 전에 주님이 오시는 것은 하느님의 자유로운 사랑이고,
바라고 청하고 기다리는 것은 우리 구원의 도리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우리 구원의 도리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고자 한다면 다른 데서 구원을 찾지 않음은 물론,
하느님은 전능하실 뿐 아니라 사랑이시라는 것을 우리가 믿고
그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시리라는 희망을 우리가 잃지 않으며,
마침내 찾아오셨을 때 그 하느님을 우리가 사랑으로 모셔드려야겠습니다.
구원이 오지만
구원을 모셔드리는 것은 우리 몫입니다.
사랑께서 찾아오시지만
그 사랑을 갈망하고 기다리고 모셔드리는 것은 우리 몫입니다.
백인대장은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실 자격이 없다고 했지만
그것은 그의 겸손이고 그의 갈망은 모실 자격이 충분하며
그래서 그의 겸손과 갈망은 대림절의 모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