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하여라, 반항하는 도성, 더럽혀진 도성, 억압을 일삼는 도성!
말을 듣지 않고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는구나.”
오늘 독서는 사람들이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고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고,
복음의 주님은 건성으로 대답하고 실천을 하지 않는 아들의 비유를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들려주시며 이들이 바로 그들이라고 꼬집으십니다.
반면에 그들이 죄인이라고 단죄한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하느님 말씀을 듣고
실천하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누가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일까 생각하게 되는데
문득 훈장 기질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저를 많이 반성하는 것이 바로 훈장 기질인데
훈장 노릇을 오래 하다 보면 가르치는 것이 기질이 되어버려
노상 가르치려고만 드는 것을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훈장 기질이 나쁜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르치려고 드는 것과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 가운데 어떤 것이 더 나쁩니까?
제 생각엔 가르치려고 드는 것보다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 더 나쁜데
특히 오늘 주님의 나무람과 관련지어 보면 듣지 않는 것이 더 나쁩니다.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이 하느님과의 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하느님 말씀까지 듣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훈장 기질의 사람은 가르침을 줄 사람하고만 상대하지
가르침을 받을 사람과는 상대하지 않으려 한다는 말입니다.
가르치는 것만 좋아하지 가르침 받는 것은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가르침도 잘 받고 가르치기도 한다면 그것을 훈장 기질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가르침을 잘 받아 잘 전달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나 성인들은 훈장 기질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느님 말씀을 잘 듣고 그것을 먼저 실천하고,
들은 것을 이웃에게 전달하거나 나누는 분들이지요.
사실 그들의 귀와 입은 다 하느님의 귀이고 입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귀와 입을 자기 것으로 생각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귀와 입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고
하고 싶은 말만 하지 않으며 자기를 내세우는 말은 더더욱 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오늘 주님께서는 가르치고 명령만 하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을
나무라시는데 제가 그런 사람이 아닌지,
공자는 나이 예순이 넘으면 耳順 곧 귀가 순하고 착해야 한다고 하고
칠십이 넘으면 從心所欲不踰矩 곧 욕심 자체가 하느님 욕심이어야 한다고 하는데,
전보다 하느님 말씀을 잘 듣고 점점 더 잘 실천하는 저인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