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느님, 저희를 하느님의 모습으로 오묘히 창조하시고
더욱 오묘히 구원하셨으니,
사람이 되신 성자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이 성탄절에 교회는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을 노래합니다.
그런데 이 성탄절에 교회는 창조와 구원을 왜 같이 노래합니까?
그것은 창조 때의 신성을 상실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것,
상실한 우리의 신성을 되찾아 주러 오신 것이 주님의 성탄이고,
이 성탄의 신비에 우리가 참여하는 뜻입니다.
그리고 어제, 밤 미사 예물 기도도 비슷하게 노래합니다.
“주님, 오늘 인간의 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과 결합되었으니
이 축제의 제물을 기꺼이 받아들이시어
저희가 이 거룩한 교환의 신비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게 하소서.”
이것으로 교회 전례는 성탄 축제가 교환의 신비를 기리는 축제,
곧 그리스도의 신성과 우리의 인성이 교환됨을 기리는 축제임을 거듭 얘기합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매일 미사를 봉헌하면서
사제가 포도주와 물을 섞을 때 하는 기도와도 같습니다.
“이 물과 술의 신비로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케 하소서.”
그러므로 이 성탄 축일에 교환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 성탄 축일에 아무런 교환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성탄 축일은 아무 의미가 없는 축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교환입니까?
그것은 위치 교환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위치에 오시고 우리는 주님의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위에서 내려오시고 우리는 위로 오르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시소와 같이 주님이 내려오시자 우리는 오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땅으로 내려오시고 우리는 하늘로 오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오시어 우리를 건져내신 것이요,
수렁으로 들어오시어 수렁에 빠진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 교환은 또한 신분 상승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되시고 우리는 신이 되는 것입니다.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참여입니다.
신성에 대한 갈망도 없고,
신성에 참여할 의지가 없으면 그 교환은 물 건너갑니다.
여전히 땅에서 살고만 싶고,
여전히 인간적으로 살고 싶어 하면 우리는 주님의 손을 잡지 않을 것이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죄의 수렁에서 구출하지도 못하시고
우리를 인성에서 신성으로 끌어올리지도 못하실 겁니다.
그러므로 이 성탄절 교환의 신비에 참여함은
마치 구출하러 온 소방관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잡듯이
불구덩이 속에 있고 수렁에 빠진 우리가 구원자 주님의 손을 잡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