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주님의 세례 축일 때 예수에 대해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오늘 첫째 독서와 복음에서는 예수에 대해 각각 이렇게 얘기합니다.
“너는 나의 종”
“하느님의 어린 양”, “하느님의 아드님”
“자기보다 앞서신 분”, “자기가 알려야 할 분”
저의 초등학교 친구가 있었습니다.
제가 서울에서 공부하다 내려가 오래간만에 만나 술을 마시며 얘기하는데
성서 구절을 많이 인용하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반가워서 세례받았냐고 물으니 그저 예수님이 훌륭한 분이기에 존경하고
삶에 도움이 되기에 성서를 가끔 읽는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 하였습니다.
옛날 도덕 교과서에서 가르치듯 세계 4대 성인 중의 하나이고
우리 인생에 있어서 스승이 될 만한 분 중의 하나이신 분 말입니다.
실제로 복음을 보면 예수님을 부를 때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지요.
그것도 나의 스승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좀 뛰어난 분을 일컫는 것으로.
저도 북한에 가면 선생님, 김찬선 신부 선생이라고 불립니다.
그저 ‘김찬선 씨’하고 부르거나 김 동무나 김 선생이라고 부를 수는 없고
그렇다고 김 신부님이라고 부르기는 싫으니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호칭을 들으면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저를 마음으로부터 신부님이라고 부르는 순간,
저를 종교인으로 진정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것일 뿐 아니라
그들도 종교, 그것도 천주교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그리고 비록 세례를 받지 않았더라도 선교가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처음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지금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도, 스승도 아니십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큰 스승으로 추앙받는 세례자 요한이 증언합니다.
이분은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그러기에 나보다도 훨씬 앞서시고 크신 분이시라고 증언합니다.
이분은 그리스도를 빙자해 우리를 등쳐먹는 사이비 교주가 아니라
진짜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우리를 위해,
우리 대신 희생제물이 되실 분이라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면서도 세상의 죄, 우리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시라고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고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요한의 물의 세례는 세상에 죄의 가책을 불러일으키는 회초리의 세례이지만
예수님의 물과 성령의 세례는 세상의 죄를 자기의 것으로 끌어안고
자신의 희생으로 세상 모든 이의 죄를 씻는 사랑의 세례입니다.
이는 어머니의 사랑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자식이 자꾸 잘못을 저지르는데 아무리 타일러도 고치지 않자
어머니는 아들을 불러놓고 당신의 종아리를 치라고 합니다.
네가 이렇게 잘못을 계속 저지르는 것은 내가 네게 나쁜 유전자를 주고
너를 잘 못 가르친 나의 잘못이니 나를 마구 치라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 희생양이 되게 하신 것도
이처럼 세상의 죄를 당신 죄로 짊어지고 없애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분이신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세례자 요한은 이런 주님을 보라고 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주님을 봐야 할 과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보기만 하면 우리 과제가 끝납니까?
본 대로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의 죄를 씻을 뿐 아니라, 남의 죄를 나의 죄로 끌어안는
어린양을 보고 닮는 것, 이것까지 해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