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생활 초기 예수님은 비정상적인 존재로 계속 의심받습니다.
친척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하고 잡으러 왔고,
이어서 어머니와 형제들도 예수님을 만나러 왔으며,
오늘은 드디어 율법 학자들이 예루살렘에서까지 와서는 악령 들렸다고 합니다.
지금의 우리로서는 어처구니없는 오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당시로는 오해의 소지가 없지 않았고 특히
오늘 복음에서처럼 교회 기득권층에게는 더 많았을 겁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을 보면서 율법 학자만 어처구니없는 인간들이라고
손가락질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도 영적 식별을 잘해야 할 것입니다.
내 안에는 어떤 영이 있는지,
나는 어떤 영에 이끌리고 있는지,
내가 지금 하는 것은 어떤 영에 이끌려 하는 것인지 등.
북한 일이든 해외선교든 살아오는 동안 많은 일을 했고 어려움도 많았는데
사실 그 일의 어려움보다 더 큰 어려움은 이 일이 과연 하느님 일인지,
하느님께서 시작하게 하시고 하느님의 힘으로 하는 일인지 식별하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이런 식별의 경험들을 통해 이제는 제 나름대로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이 일을 하는지 아니면 성취욕 때문에 하는 것인지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하는지 나의 만족을 위해 하는 것인지
-나의 비판이 시기 질투에서 비롯됐는지 정의에서 비롯됐는지
-나의 중재가 일치를 지향하고 일치를 낳는 것인지 그 반대인지
그리고 모든 것을 이런 식으로 식별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소분류 하지 않고 대분류적으로 식별한다면
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사랑이면 성령에 이끌리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성령이 아닌 것에 이끌리는 것이라고 단순화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단순화할 수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다시 이렇게 질문하게 되겠지요?
‘성령이 아닌 것’이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들은 ‘육의 영’이거나 ‘더러운 영’이거나 ‘악령’일 것입니다.
늘 자기를 향하게 하는 ‘육의 영’이요,
늘 세상을 향하게 하는 ‘더러운 영’이며,
늘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선들을 파괴하려는 ‘악령’입니다.
이런 영들이 성령을 도외시하거나 무시하거나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듯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지금까지와 다른 성찰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늘 무엇을 하며 그것이
성령에 이끌리는 것인지 아닌지 그 점에 대해서 식별했는데
그렇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성령에 이끌리는 것인가?
게으름의 영,
무기력의 영,
무관심의 영,
이런 영도 있는지 모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사랑도 하지 않는,
그래서 무사안일하려는 영에 이끌리는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