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사절로 삼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다고 얘기합니다.
여기서 화해란, 한자로 화목할 화和, 풀 해解입니다.
매이거나 묶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풀고
관계가 좋지 않다면 그 안 좋은 관계는 좋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화해란 우선 묶인 것이나 매인 것에서 풀려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매어있고 무엇에 묶여 있다는 것입니까?
뒤집으면 누구에게서 풀려나고 무엇에서 풀려나는 것입니까?
나에게 안 좋게 하거나 안 좋은 감정을 가진 사람에게 매여 있는 거고
그런 사람에게서 풀려나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 번 생각해봅시다.
내가 그에게 매여 있다면 기둥에 죄수를 묶듯이
그가 나를 자기에게 묶거나 잡아매서 내가 그에게 매이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비록 내게 나쁜 짓을 했고 나쁜 감정을 가졌어도
그가 나를 묶거나 잡아맨 것이 아니라 내가 그에게 매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좋아하는 것에 집착하고 사랑에 매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싫어하는 것에도 매이고 미워하는 것에도 매입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내게 안 좋게 한 사람에 대한
안 좋은 나의 감정에 내가 매이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매인 것을 푼다는 것은 내게 안 좋게 한 사람에 대한
안 좋은 나의 모든 감정들, 미움. 분노. 복수, 질투, 서운한 감정 등
한 마디로 내 안의 모든 악감정惡感情을 푸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악감정을 갖게 한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악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는 나를 봐야 합니다.
그가 나의 악감정들을 풀어주기를 바라지 말고
내게 좋은 말만 해주기를 바랐던 나의 욕심과
좋은 뜻을 왜곡할 수밖에 없었던 나의 과민함과
용서해줄 수 없는 내 사랑의 미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아들이 그렇게 큰 잘못을 했어도
그 잘못보다 큰 사랑을 가졌기에 다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비해 형은 자기한테 잘못한 것이 아닌데도
아버지만큼 사랑을 가지지 못했기에 적개심을 끝까지 풀지 못하지요.
성무일도 사순절 찬미가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무리 우리 죄가 크다 하여도 당신의 그 은혜가 더 크시기에
당신의 자비로서 참아 주신 이 당신께 돌아서게 하여 주소서”
그렇습니다.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이 나에 대한 그의 잘못보다 커야만
우리는 어떠한 악감정에도 매이지 않을 뿐 아니라
그와 좋은 관계, 곧 화목한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화해란 가까스로 악감정에 매이지 않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런 화해는 미완성의 화해입니다.
그러니 무시나 무관심으로 악감정을 눌러놓는 것은 화해가 아닐뿐더러
어쩌면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나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감정에 매이지 않을 뿐 아니라
관계까지 좋아져야 진정한 화해를 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돌아온 아들을 마지못해 받아들여 일꾼으로 쓰시는 게 아니라
잃었던 아들이 왔다하며 좋은 옷 입히고 잔치벌이는 아버지처럼
완전한 관계의 회복, 이것이 화해의 완성입니다.
악감정에 시달리는 내 모습
둘째 아들의 모습이기를 그리하여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기를 기도 합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