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행복 선언인데 그 시작 부분을 언뜻 보면 이해가 잘되지 않습니다.
군중이 있는 곳에서 가르침을 주시지 않고, 굳이 산으로 올라가 거기까지
따라온 제자들에게만 행복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그런데 이것은 제자가 아닌 사람에게는 행복 lesson을 배제하신 겁니까?
이는 어떤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피아노 레슨을 해주는데
돈 많은 집 아이들만 제자 삼아 피아노 레슨을 해주고
가난한 집 아이들은 제자로 삼지 않는 것과 같은 겁니까?
그러니까 일반 군중은 놔두고 제자들만 데리고 올라가 행복을 가르치신 것이고,
결과적으로 제자가 아닌 군중에게는 ‘행복 배제’와 ‘행복 차별’을 하신 것입니까?
우리의 주님은 그럴 분이 아니라고 우리가 믿는다면
하늘나라의 행복을 얻으려는 사람은 산 위로 올라오라는 뜻이고,
그런 열정이 있는 사람만이 힘들어도 산 위까지 올라와
주님의 행복 레슨을 받는 제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일 것입니다.
제가 옛날에 저희 형제들에게 오르간 레슨을 해준 적이 있고,
저의 레슨을 받은 형제가 100명을 넘는데 배우고픈 열망이 커,
저에게 끝까지 배우고, 지금까지 오르간을 치는 형제는 10명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행복 레슨도 이처럼 배우고픈 열망이 커야지만 배우는 것인데
주님의 행복 레슨은 이 세상 행복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 행복이기에
이 세상을 떠나 하느님을 만나는 산까지 올라야 배울 자격이 있다는 뜻입니다.
성무일도 초대송 시편 중에, “주님의 산에 오를 이 누구인가?” 이런 시편이 있는데
복음에서 산은 하느님 계신 산이요 하느님 나라의 행복 레슨이 이뤄지는 곳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이 세상 나라의 행복과 다릅니다.
부자가 행복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며,
가난도 물질적 가난이나 마음의 가난이 아니라
영으로 가난한 사람이라야 참으로 행복합니다.
(현재 우리의 번역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잘못 번역되어 있음)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란 욕심이 없는 사람 정도인데,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가난은
욕심이 없는 가난 정도가 아니라 영으로 가난한 것입니다.
왜냐면 영으로 가난해야지만 하느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고,
하느님 나라를 소유해야지만 물질이 아니라 영으로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성령 충만하면 그것이 참 행복이고,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행복이라는 말입니다.
가난뿐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의 행복 조건은 이 세상 나라의 행복 조건과 다릅니다.
이 세상에서는 슬픔이 없고, 고통이 없고, 박해가 없는 것이 행복 조건인데
하느님 나라의 행복은 이런 것들을 오히려 감수하고 감당할 수 있어야
영으로 행복할 수 있는데 이런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얻으려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얻고자 하느님의 산으로 오를 제자가 얼마나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