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오늘은 묵상 주제를 마음으로 잡아봤습니다.
복음이 어제에 이어 마음을 얘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인간의 전통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린다고 주님께서 나무라시며 입술로는 하느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은 이미 하느님에게서 멀어졌다고 꼬집으셨지요.
그리고 오늘은 우리가 정결해야 한다면 손이나 발이 아니라
마음이 정결해야 한다시며 마음에서 온갖 죄가 나온다고 하시는데
인간의 마음을 사뭇 부정적으로 그러니까 죄의 온상으로 보십니다.
실제 우리도 마음을 좋게 보지 않습니다.
제 맘대로 한다고도 하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할 때, 이때의 마음은 좋은 마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은 얼마나 자기중심적입니까?
어떻게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들고,
어떻게 모든 것이 자기 맘에 들기를 바랍니까?
마음이 바다같이 넓다면 그나마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을 텐데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마음 안에 들어오길 바라니 얼마나 자기중심적이고
마음에 안 들면 화를 내고 미워하니 얼마나 폭력적입니까?
그렇지요.
꼭 주먹을 써야 폭력적인 것이 아니지요.
미움이나 분노 같은 감정 폭력도 폭력이지요.
아무튼, 우리 마음이 자기중심적일 때
오늘 주님 말씀대로 온갖 죄와 악이 마음에서 나옵니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마음 때문에 비관에만 빠져있을 수 없고 그래서는 안 됩니다.
마음 안에서 이 모든 것이 나오고 마음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면
정신을 차려
마음을 바꾸고 곧 회심하고,
마음을 잡으면 곧 조심하면 됩니다.
프란치스코의 가르침대로
우리의 육의 정신을 버리고 기도와 헌신의 정신을 차리고,
우리의 마음을 바꾸고 바꾼 마음을 단단히 잡으면 됩니다.
지난 대림절 강론에서 이미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방심한 것을 다시 조심해야 합니다.
방심은 마음을 놓는 것이고,
조심은 풀어진 마음을 잡는 것이지요.
조심의 조操 자가 ‘잡다’, ‘쥐다’, ‘조종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조심한다는 것은 풀어진 마음을 다시 잡는 것이고,
이는 말고삐를 다시 잡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말의 고삐를 죄지 않고 풀어놓으면 말이 제멋대로 돌아다니지만
다시 말고삐를 잡고 조이면 말을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있지요.
조심한다는 것은, 이처럼 마음의 말고삐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방심을 조심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본대로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는데 정신을 차리고 회심하는 겁니다.
마음에서 모든 것이 나오니
우리 오늘 경각심을 가지고,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다시 잡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