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님께서는 눈먼 이의 눈을 뜨게 해주시는데
모든 사람이 보는 데서 고쳐주시지 않고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것도 마을 밖까지 데리고 나가셔서 고쳐주십니다.
이 의미가 은밀한 사랑의 표시라고 예전 강론에서는 얘기했는데
오늘은 그 의미를 다르게 묵상해봤습니다.
오늘 복음 끝에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과 오늘 독서와 연결해 묵상해보니 다른 관점에서
그 의미를 둘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의미는 영적인 눈이 새로 열리는 것과도 연결이 됩니다.
육신의 눈만 열린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도 열렸을 것이고,
그래서 세상은 이제 새 세상이 되었을 겁니다.
그러니 그가 살던 저 마을은 옛 세상이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 것의 의미도,
그를 옛 세상에서 빼내시는 의미일 것이며,
저 마을로 돌아가지 말라심은 옛 생활로 돌아가지 말고,
새 세상으로 나아가 새 삶을 시작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오늘 창세기의 노아 얘기도 같은 의미지요.
홍수로 세상은 파국을 맞게 되었지만
파국이 노아에게는 새 세상의 시작이고,
그것도 육백한 살에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육백 년을, 없어져야 할 세상에서 산 셈입니다.
그리고 삼백오십 년은 새 세상에서 살 것입니다.
이렇게 보니 저나 나이 들었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 참 의미가 있겠습니다.
이 나이를 십분의 일로 줄이면 환갑까지 산 다음 35년은 새롭게 사는 겁니다.
환갑까지 참 인간적으로 그리고 세속적으로 살았습니다.
이 나이에, 뭐 새로울 것이, 있겠냐고도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이렇게 생각하며 살다가 죽을 수도 있지만
오늘 복음에서 깨우침을 받고 노아에게서 깨우침을 받는다면
나이 먹었다고 주저앉지 않고 지금 새 삶을 시작할 것입니다.
고작 회춘하려 들지 않고 회생의 삶을 용기 내어 시작할 것입니다.
다시 봄을 맞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생을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니만큼 뼈를 깎는 아픔이랄까 죽음에 이르는 고통이 없을 수 없겠습니다.
전에도 예를 든 적이 있지만, 독수리의 회생과 같습니다.
몇 년 전 저는 이렇게 독수리의 회생에 대해 묘사했지요.
“독수리는 70년을 사는 장수 동물이지요.
그런데 독수리가 70년을 살기 위해서는 40세에 갱년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40세가 되면 독수리의 부리와 발톱과 깃털은 노쇠하여
그대로 놔두면 사냥을 제대로 할 수 없어 죽게 됩니다.
이때 독수리는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그대로 죽을 것인가 환골탈태할 것인가.
환골탈태를 선택한 독수리는 높은 산꼭대기로 올라갑니다.
먼저 바위를 쪼아 낡은 부리를 부숴버리고 새 부리가 자랄 때까지 기다립니다.
새 부리가 자라면 새 부리로 낡은 발톱을 다 뽑아버리고
새 발톱이 자랄 때까지 기다립니다.
새 발톱이 자라면 새 발톱으로 낡은 깃털을 다 뽑아버리고
다시 새 깃털이 자랄 때까지 기다립니다.
이렇게 해서 독수리는 새 부리와 새 발톱과 새 깃털을 가지게 되고
이렇게 해서 독수리는 새로운 30년 더 살게 됩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삼십 년을 더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과 다른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하느님 나라가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인생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