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독서와 복음의 공통점은 요나 얘기라는 점입니다.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에게 줄 표징은
요나의 표징밖에 없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여기서 요나의 표징이란 어떤 의미인지 봐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표현을 하십니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표징이란 하느님의 표징이고,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 계신다는 표시거나
하느님 친히 그렇게 하셨다는 표시입니다.
옛날에 우리는 ‘그 개망나니가 사람 됐다.’라는 표현을 가끔 썼습니다.
망나니란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온갖 못된 짓을 다 하는 사람을 일컫지요.
그런데 그 개망나니가 개과천선했다면 분명 어떤 곡절이 꼭 있었을 거라고
궁금히 여기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그를 바뀌게 한 것임이 드러나면
사람들에게 그 개망나니는 하느님의 표징이 되겠지요.
아무튼, 도저히 바뀔 것 같지 않은 요나가 바뀐 것,
곧 회개할 것 같지 않은 요나가 회개한 것은 니네베 사람을 회개하게 합니다.
요나가 그렇게 고집부리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 사실을
니네베 사람들이 알기에 그런 그가 자기처럼 죽지 않으려면
회개하라고 하는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던 거지요.
이렇게 이방인인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가 하느님의 표징이 되어 회개했는데
이스라엘인들이 요나보다 더 큰 표징인 주님을 보고도 회개치 않고
다른 표징을 요구하니 주님께서는 그들이 악하다고 하시며
당신 외에 다른 어떤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주님 당시의 이스라엘인들은 악합니다.
그리고 어떤 표징도 받지 못할 불행한 족속입니다.
왜 악합니까?
우선 그들은 표징을 요청하지 않고 요구합니다.
겸손하게 청하지 않고 교만하게 요구하는 겁니다.
하느님 사랑이 그리 간절하지 않거나
하느님 나라가 달갑지 않은 것입니다.
능력이 있으면 한 번 설득해보라는 식이고,
나의 이 완고한 마음을 깰 수 있으며 깨고
돌릴 수 있으면 한번 돌려보라는 식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완고한 마음과 간절하지 않은 마음 소유자가 나는 아닌지
니네베 사람보다 더 회개할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닌지 돌아보는 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