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신명기에서 모세는 이스라엘만큼 주님께서 가까이 계신 민족이 있냐고
자기들이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시는 민족이 있냐고 백성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그런데 이것이 주님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만 가까이 계신다는 뜻이겠습니까?
우리에게는 가까이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이겠습니까?
그럴 리 없고 그러실 분이 아니라면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신다고 느끼는 족속이 있고,
전혀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족속이 있을 뿐이고 뿐이겠습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하느님 현존 체험을 말하는 것이고,
신앙인이란 하느님 현존 체험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지요.
저도 나이 먹어갈수록 더 하느님 현존 체험 가운데 살아갑니다.
아니 체험이라기보다는 늘 하느님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느낌도 하느님께서 내 옆에 계신다는 느낌보다는
내가 늘 하느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또는 하느님 안에서 살아간다는 느낌입니다.
그게 그거 같지만 제게는 느낌이 좀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손님처럼 와 옆에 계신다는 그런 느낌이 아니라
전에는 내가 다른 데 머물곤 했는데 이제는 어디 가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사는 느낌 그것도 늘 머무는 느낌입니다.
바다의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고 늘 물속에서 살듯이
저도 하느님이라는 바다 또는 하느님 사랑과 은총의 바다에서
뭔 짓을 하든 하면서 살아가는데
다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기도 딴짓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전엔 딴짓할 때는 하느님께서 감시하신다는 느낌
또는 하느님께 들켰다는 느낌 같은 것이 있었고
당연히 이때의 하느님은 두려움의 하느님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느낌이 거의 없고 오히려 그래서 탈입니다.
아무리 딴짓해도 하느님 사랑을 벗어나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기 때문인지
하느님 사랑 안에 있다는 느낌이 언제나 있고 하느님이 편한데 그것이 문젭니다.
아직도 사랑 미성숙입니다.
아이가 부모의 사랑 안에 머물며 온갖 혜택을 누리지만
부모가 원하는 것은 하지 않고 제멋대로 하며
받기만 하고 드릴 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성숙하면 할수록 그리고 사랑하면 할수록
사랑받는 것도 잘하지만, 드릴 줄도 알게 되고,
사랑하는 분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실천하려고 하지요.
그렇습니다. 무엇이든 다 실천하려고 하는데
큰 것은 물론 작은 것도 다 실천하려고 합니다.
사실 큰 사랑은 상대가 원하는 작은 것까지 빠트리지 않고 실천하고,
작은 사랑은 다 실천할 수 없기에 생각나는 큰 것 한두 가지만 실천합니다.
그렇잖습니까?
사랑이 작은 자식은 부모가 좋아하는 것 한두 가지만 알고,
알더라도 그 좋아하는 것을 벼르고 별러서 해드리지만
사랑이 크신 부모는 자식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그것을 별러서 하지 않고 당연한 듯 일상으로 해주시지 않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작은 자란 사랑이 작은 자를 말함이고,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은 사랑이 큰 사람이라는 것을 배운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