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내신 이야기를
다른 복음에 비해 상대적 더 많이 소개하고 있는데,
두 번은 예루살렘에서 당신을 나타내시고
다른 한 번은 오늘 복음에서 보듯 갈릴래아에서 당신을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에서도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시고 거기서 당신을 나타내십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왜 제자들을 굳이 갈리래아로 가게 하신 것일까요?
갈릴래아가 제자들에게 어떤 곳이기에 그리로 가게 하시는 것일까요?
갈릴래아는 우선 예루살렘이 아니고,
갈릴래아로 간다는 것은 예루살렘을 떠나가는 것입니다.
복음의 여정은 애초 갈릴래아에서 활동하던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향해가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은 왜 예루살렘을 향해 갔냐는 것입니다.
거기서 당신이 돌아가실 것 뻔히 아시면서 주님께서는 왜 가셨고
갈릴래아로 되돌아가게 하실 거면서 왜 제자들을 데리고 가셨냐는 겁니다.
출세出世라는 말이 세상으로 나아간다는 뜻인데
이스라엘의 변방 갈릴래아에서 중심인 예루살렘으로 향해 갈 때
제자들은 출세의 꿈을 꾸고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예루살렘 입성이 임박했을 때는 제자들끼리 자리다툼까지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속절없이 돌아가시고
그로 인해 제자들의 꿈도 허사가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꿈이 허사가 되는 체험을 하게 하려고
제자들을 예루살렘까지 데리고 가셨던 것일까요?
고작 그것이 예루살렘으로 가신 목적이라면 너무 허무하지 않나요?
출세의 꿈이 허사가 되는 것이 최종 목적이었다면 허무하기만 할 겁니다.
그러나 허사가 허무는 아니었습니다.
세속의 꿈이 허사가 되는 거기서 새로운 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을 떠나 갈릴래아로 가는 것이 일단은
지금까지 꿈꾸던 것이 허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네.”라고 하였을 때
제게는 그것이 “나는 고기나 잡으러 가네!”라는 말로 들립니다.
여러분에게도 자포자기적이고 체념적인 표현으로 들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고기를 잡기 시작하고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합니다.
그 옛날 자기가 수없이 고기를 잡던 곳인데
어찌된 일인지 한 마리도 잡히지 않고 또 다시 허사가 되고 맙니다.
예루살렘에서의 꿈이 허사가 된 것은 갈릴래아로 돌아가
다시 옛날 직업으로 돌아가라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또 다시 허사체험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옛날로 돌아가게 하는 허사가 아니라 새롭게 시작하게 하는 허사입니다.
쌓고는 허물고, 허물고 또 쌓는 모래성처럼
주님께서는 새로운 집을 짓게 하려고
종종 지금까지 우리가 지은 것을 허물어 버리십니다.
주님은 종종 이렇게 내가 이룬 것을 다 허물고 나타나십니다.
그러니 고기잡이가 허사가 된 새벽은 신 새벽이고,
내가 애쓴 것은 허사가 되지만 <주님>께서 나타나시는 신 새벽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받은 제자가 외칩니다.
“주님이십니다.”
그저 예수님이 아니라 <주님>이신 겁니다.
베드로는 그 말에 주님께 가려고 호수로 뛰어듭니다.
주님을 뵙고자 하는 열망이 드러나는 행위입니다.
이런 베드로와 제자들을 위해 주님께서는
물고기와 빵으로 아침을 손수 차려주십니다.
참으로 따듯한 아침이고 새로운 힘을 주는 사랑의 성찬례입니다.
이런 허사체험과 성찬례를 통한 주님의 현존과 사랑 체험으로
베드로와 제자들은 갈릴래아에서 처음 부르심 받았을 때처럼
새롭게 제자로 부르심 받고 새로운 하느님 나라 건설에 착수합니다.
그리고 오늘 사도행전에 보듯 베드로는 이렇게 복음을 선포합니다.
사람들이 허물어 버린 돌이 하느님 집의 모퉁이 돌이 되었다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