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주 너의 하느님께 너를 위하여 표징을 청하여라.”(1독서)
“보십시오.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 왔습니다.”(2독서)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복음)
주님께서 아하즈에게 표징을 청하라고 하시자 아하즈는
표징을 청하지도, 주님을 시험하지도 않겠다고 합니다.
아주 올바른 태도입니다.
표징을 청한다는 것은 말이 청하는 것이지 사실은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다는 것을 증명해보이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대단히 무례하고 시건방진 태도입니다.
그런데 청하든 요구하든 아무튼 표징을 보여 달라고 하는 것은
태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표징을 보지 못하는 불능의 문제입니다.
하느님의 표징이 널려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고,
그러니 그것은 하느님 손해가 아니라 우리의 손해인 것입니다.
본래 욥기가 얘기한 거고, 저도 자주 하는 얘기가 있는데
매일 떠오른 해가 왜 하느님의 표징이 아니냐는 겁니다.
이 해가 생기는데 제가 한 일이 있고, 또 인간 누가 한 것이 있습니까?
매일 해가 떠오르는데 제가 한 게 있고, 어떤 누가 한 것이 있습니까?
저를 포함하여 어떤 인간도 한 것이 없다면 하느님께서 하시는 거지요.
무신론자라면 모를까 신자라면 이것을 믿는 사람이지요.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표징, 기적을 보여 달라고 징징대지 말고
오늘 우리가 복음에서 들은 마리아와 같은 태도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어떤 때도?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것들을 하느님의 표징으로 보면서
이것이 “무슨 뜻일까 곰곰이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일까?
하느님께서 병을 주신 뜻이 무엇일까?
하느님께서 이 사람을 주신 뜻이 무엇일까?
하느님께서 이 고통을 주신 뜻이 무엇일까?
하느님께서 나를 이리로 보내신 뜻이 무엇일까?
이렇게 곰곰이 생각해서 그 뜻을 알았다면
이제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할지 우리의 태도를 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묵살할 것인가, 아니면 존중하고 따를 것인가?
역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다른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야지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믿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럼에도 하느님을 믿는다면서 실천치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뜻을 알기만 하고 실천치 않는 것인데요,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알기는 하지만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죠.
사람에 따라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별개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알뿐 아니라 실천까지 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는 것이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는 것만큼 실천하지는 않지만
사랑하면 사랑하는 것만큼 반드시 실천한다고 할 수 있지요.
우리의 어머니 마리아가 그런 분이십니다.
곰곰이 생각해도 아직 그 뜻을 다 알 수 없지만 그대로 되라고 하십니다.
수동태이기에 소극적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믿고, 믿기 때문에 모든 걸 다 맡기는 수동태입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돌아봅니다.
저는 얼치기입니다.
선택적으로 실천하는 것을 보면 하느님을 사랑키는 하는데
제 좋을 대로 사랑하고 제 좋을 대로 실천하는 사랑 얼치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