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나는 어찌 악을 저지르면서도 빛을 미워하지 않고 빛으로 나아가는가?
뻔뻔스러움인가, 가증스러움인가, 위선인가?
그렇다. 세 가지 다다.
악을 저지르면서도 선을 사랑하고 거고,
악을 저지르면서도 하느님을 떠나지 않겠다는 거다.
하느님을 떠나서 악을 저지르지 않고 하느님 앞에서 저지르겠다는 거다.
제가 왜 이런 생각을 했는가 하면
아담과 하와처럼 되지 않고 다윗처럼 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가 한 죄를 감추려고
하느님으로부터 숨었고, 하느님과 멀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자기의 죄와 악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하느님은 시편 139편이 얘기하듯
“나를 샅샅이 보고 아시고, 앉거나 서거나 매양 나를 아시며,
멀리서도 내 생각을 꿰뚫으시고, 내 뱃속까지 꿰뚫어 보시는” 분이기에
밧세바와 간음죄를 짓고 우리야까지 죽인 것이 드러났을 때
즉시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라고 죄를 고백하고
참회의 시편 51편을 다윗은 지었지요.
“나는 내 죄를 알고 있사오며 내 죄 항상 내 앞에 있삽나이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죄를 지었삽고, 당신의 눈앞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니 다윗도 처음에는 자기 죄를 숨기려 하였지만
들통이 난 뒤 자기 죄는 다 하느님 앞에서 짓는 죄임을 깨닫고
하느님 앞에서 죄를 지었다고 고백하고 살려달라고 하는 겁니다.
어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산보삼아 뒷산에 오르니
소나무들이 너무도 빽빽이 심겨져 햇빛을 못 본 나무들은 죽어 있고
살아있는 나무들은 햇빛을 받기 위해 경쟁하듯 하늘로 치솟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느꼈습니다.
살려면 저렇게 기를 쓰고 빛을 향해 하늘로 올라야 하는구나!
저도 그런 것입니다.
진리보다 악을 더 실천하는 저이지만
어차피 저의 죄와 악을 숨길 수 없다면
살기 위해서 하느님께로 나아가겠다는 겁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라고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시지만 우리는 진리를 실천치 못할지라도,
그래서 우리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할지라도
마음의 진실을 반기시는 주님을 믿고
주님께 살려달라고 나아가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뻔뻔해야 삽니다.
하지만 이 뻔뻔스러움 안에는 좋은 뜻도 있습니다.
행위는 진실하지 못해도 마음만은 진실하자는 것이고,
행위가 비록 악해도 하느님으로부터 도망치지 말자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