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 미움밖에 없는 사람도 사랑하고 싶어 합니다.
지금 사랑을 포기한 사람도 사랑하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제가 이런 확신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는 강아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고 나서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을 깨닫고 나서입니다.
얼마나 사랑하고 싶으면 강아지라도 사랑할까 저는 이런 생각을 종종 하는데
지금은 강아지밖에 사랑할 수 없는 사람도 사랑하고 싶었던 사람이고
여러 번 자기 사랑이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경험을 한 다음부터,
그래서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고 버겁다고 느낀 다음부터 인간 사랑을 포기하고,
강아지 사랑밖에 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왜 이렇게라도 사랑하고 싶어 할까?
왜 인간은 사랑 타령을 그리도 좋아하고 많이 할까?
그 근원을 생각해보니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고,
그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아무튼 인간은 사랑하고 싶어 합니다.
자기 사랑이 거부당한 경험 때문에, 사랑을 포기했거나
사랑에 대한 적개심이 생겨 그 반감으로 오히려 미워하는 사람일지라도.
그렇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하고 싶어 하지만,
사랑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성공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인간을 가장 사랑하면서 인간에게는 꼭 뭘 바라기에 실패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훌륭하기를 바라기에 실패하거나
사랑을 하면 뭔가 응답이나 보답이 있기를 바라기에 실패하거나,
나만 사랑하고 다른 사람은 사랑치 않기를 바라기에 실패하거나
아무튼 뭔가 바라는 것이 있기에 실패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하시는데,
그것도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하시는데,
하느님 사랑이 쉽지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가장 어렵습니다.
그래서 하느님도 사랑하고 싶지만
가장 성공하기 쉽지 않습니다.
당연하지요.
보이지 않는데,
응답이 없는데,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느낍니까?
그러니 하느님 현존 체험을 하기 전에는 사랑하겠노라고 감히 까불지 말 것입니다.
하느님이 내 사랑의 대상으로 나타나기 전까진 사랑할 수 없음을 겸손히 인정하고,
하느님이 당신을 나타내 주시기를 겸손히 청하며 사랑의 때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현존 체험은 엘리야가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구름이 걷혀야 하늘이 보이듯
감각적 인간 사랑이라는 구름이 걷혀야 감각을 넘는 하느님 사랑이 보입니다.
엘리야는 사랑은커녕 적대자와 원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도망쳐 가 하느님을 만나고 싶었지만
하느님은 강한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 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런 것들이 지나간 뒤에야 주님은 보이고 들립니다.
거창한 기적과 함께 강하고 자극적으로 하느님이 나타나시길
지금까지 바랐다면 그런 것들이 다 지난 뒤에야 하느님은 나타나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