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거의 모두 남이 내 맘에 들기를 바랍니다.
마음이 옹졸한데도 그 옹졸한 맘에 들기를 남에게 바랍니다.
마음이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데도 그 맘에 들기를 바랍니다.
그러니 거의 모두 내 맘에 들지 않고 그래서 미워하고 분노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미움과 분노는 다 내 맘에 들기를 바라기에 생기는 것이지
반대로 내가 네 맘에 들려고 하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마음에 들어가는 것이 어찌 가능합니까?
그 작은 마음 때문에 모든 것이 맘에 들기는 불가능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내 안에 미움이나 불만이나 분노가 있다면
그것은 백이면 백 다 바라는 마음 곧 욕심 때문이고,
내 마음이 바다같이 넓지 않고 옹졸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서 성심을 바다에 비겨 성찰하고자 합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상선약수라고 하였지요.
가장 좋은 선은 물과 같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과 하느님 사랑이 상선입니다.
시편 말씀처럼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우리가 깨닫고 맛보게 된다면 이것보다 좋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좋으신 하느님은 물과 같기에
가장 낮은 사람이 그분을 깨닫고 맛보게 되지요.
물은 거슬러 흐르지 않고 아래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가장 낮고 겸손한 사람에게 흘러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바다야말로 가장 낮고 그래서 모든 물은 결국 바다로 흐릅니다.
바다는 가장 낮기에 가장 크고 넓으며
가장 크고 넓기에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영성적으로는 겸손이 바다이고 겸손한 마음이 바다입니다.
겸손한 마음은 자신을 가장 낮추지만 그러기에 모든 것을 수용합니다.
사랑도 가장 많이 수용하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다고 하시며
고생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다 당신에게 와서 배우라고 하시고,
그리하는 사람은 누구나 마음의 안식을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 성심은 겸손하고 온유하여 바다와 같이 넓고,
그래서 모든 사람을 다 받아들일 수 있고,
그런데도 마음이 부대끼지 않고 안식을 누릴 수 있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작 주님의 마음을 닮으려는 이유는 마음의 안식 때문이 아닙니다.
앞서 봤듯이 바다와 같이 낮고 넓은 마음이 하느님의 사랑을 수용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성심에게서 배우려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랑도 감성적인 사랑이 아니라 수난의 사랑 곧 Passio입니다.
수난의 사랑이란 아버지 뜻대로 우리를 위한 속죄 제물로 당신을 바치는 사랑이고,
그래서 우리의 죄를 당신의 죄로 삼으시는 사랑이며,
그 마음이 어떤 상처를 받아도 그 상처로 우리 상처를 낫게 하시려는 사랑입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을 굳이 인간의 것과 비교한다면
어머니의 마음과 어머니의 사랑일 것입니다.
언젠가 고백성사를 주는데 한 분이 성사를 보시며
당신은 죽을죄를 지었다며 통곡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려
무슨 죽을죄를 지으셨냐고 여쭈니 이혼하셨다는 거였고,
그래서 연세가 있으신데 어찌 이혼하셨냐고 또 여쭈니
당신이 아니라 당신 아들이 이혼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신 아들이 이혼한 죄가 당신의 죄라고 생각하시는 거였습니다.
어미의 사랑은 아들의 죄를 당신의 죄로 받아들이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성심을 닮고 이런 어미의 사랑을 닮는다면
죄를 지었다고 그저 형제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고,
형제의 죄로 마음이 상처받았다고 징징대지 않을 것이며,
반대로 형제의 죄를 마음 아파하고 그 죗값을 대신 치르려 할 것입니다.
내 마음이 어떤지 돌아봅니다.
상처를 줘도 상처받지 않으려는 수준입니다.
죄를 지었다고 형제를 맹비난하지는 않고 조금 마음 아파하는 수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