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주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부르십니다.
그러나 내용을 보면 많은 제자 중에서 열둘을 뽑으시는 겁니다.
왜 뽑으셨고 왜 열둘을 뽑으셨을까요?
열둘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대표하는 열두 사도로 하느님 나라를 세우시려는 겁니다.
그런데 복음의 전후 맥락을 보면 열두 사도를 뽑는 더 절실한 이유가 있습니다.
앞부분에서 주님께서는 많은 안타까움을 표하시는데 그 안타까움이 대단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주님의 안타까움은 두 가지입니다.
우선 양들이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습니다.
그리고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습니다.
그런데 군중은 누구에게 시달리고 왜 기가 꺾여 있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참고하면 강도들에게 시달리고,
불충한 집사들에게 시달립니다.
강도들은 그저 양들을 팔아먹고 잡아먹으려만 든다고,
불충한 집사는 제 때에 정해진 양식을 나눠주지 않고
술이나 먹고 종들을 학대한다고 주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신 바가 있지요.
강도들이란 세상 권력자들과 악덕 기업가들일 수도 있고,
불충한 집사란 우리 공동체의 책임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 의해 양처럼 순하고 힘없는 군중이 시달리는 것도 안타깝지만
오늘 주님의 더 큰 안타까움은 그런 양들을 지켜주고
종들에게 먹을 것을 줄 목자와 집사가 없다는 겁니다.
사실 양들이 기가 꺾인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시달려도 내 편이 되어줄 목자가 있다면 기가 꺾이지는 않을 텐데
아무리 둘러봐도 내 편이 되어줄 목자가 없습니다.
그것이 주님 보시기에 더 안타깝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고 한탄하시며
열두 사도를 착한 목자와 충실한 집사로 뽑아 세우십니다.
우리 모두는 양들이기도 하고 목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종들이기도 하고 집사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종들이고 양들이며 주님의 집사이고 목자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나를 주님의 집사로 부르시고
주님의 목자로 뽑으신다면 어떻게 응답하실 겁니까?
순종하시겠습니까? 불순종하시겠습니까?
순종은 하지만 억지춘향입니까? 기꺼이 응답하실 겁니까?
영예롭게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부담으로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오늘 주님께서는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병자와 허약한 자를
고쳐 주게 하시는 것이니 이것을 우리는 영예롭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인간적으로는 그럴 힘이 없고 그래서 부담스럽지만
신앙적으로는 영예로 생각하고 주님의 힘이 입어 그 역할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 가지 말고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에게만 가라고 하십니다.
먼저 이스라엘에 가고 나중에 이방인들에게도 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밖으로 길 잃은 양들을 찾아 나서기 전에
안에서부터 그러니까 나부터 그리고 같이 사는 사람부터 돌봐야겠습니다.
세상의 복음화 전에 나의 복음화와 공동체의 복음화를 하고,
밖의 병자와 허약한 이를 치유하기 전에 안에서부터 치유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