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오늘 김대건 신부님 축일의 독서로 방금 들은 이 말씀은
주님의 최후 만찬 복음의 다음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그리고 이 두 말씀이 이렇게 연결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끝까지 사랑하셨기에
그 사랑받는 제자들은 끝까지 견디었다.
그 사랑받은 김대건 신부님도 끝까지 견디었다’로.
절망의 상황에서 모진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은 사랑입니다.
너의 사랑이든 나의 사랑이든 사랑이 견딜 수 있게 하고,
하느님의 사랑이면 더더욱 견딜 수 있게 합니다.
물론 겸손도 고통을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왜 내게 이런 고통이?’라고 반발하지 않고
겸손히 수용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겸손이 고통을 수용하게 하는 힘이라면
사랑은 고통을 그저 수용하는 것을 넘어
달게 받아들이게 하는 힘입니다.
저는 몇 년 전서부터 감수 곧 달게 받아들이는 것에
생각이 많이 머물고 그러기에 당연히 많이 얘기하는 주제입니다.
사랑은 고통을 억지로 또는 가까스로 받아들이지 않고,
진정 달게 받아들이는 힘입니다.
저는 요즘 더위와 소음 이중고에 시달립니다.
식당 옆 건물을 새로 짓는데 그 소음이 크고
여름 더위에 주방 열기 때문에 그 더위가 대단하지요.
그런데 고통은 고통인데 고통의 그 순간,
이까짓 고통은 고통도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사랑을 조금만 떠올려도 불의 열기가 사랑의 열기로 바뀌고,
이마에서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땀은 고통을 사랑이 되게 하기에 자랑스럽습니다.
중요한 것은 첫째로 사랑으로 시작해야 하고,
다음으로 고통의 그 순간에 사랑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통에 파묻혀 사랑을 떠올리지 못하면 말짱 헛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고통의 그 순간에 고통에 파묻히지 말고,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랑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땀과 고통을 사랑으로 잘 바꾼 분들이 성인이고
오늘 우리의 성인,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입니다.
자형의 밀고로 아버지가 순교하시고, 어머니는 반쯤 실성 상태가 되는 등,
그야말로 집안이 풍비박산 났을 때 인간적으로는 마음이 얼마나 쓰라렸겠습니까?
그런데 그때마다 김대건 신부님은 오늘 복음 말씀을 떠올리셨겠지요.
“그때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고통의 그때 복음과 하느님의 사랑을 떠올리면 성인이고,
그렇지 못하고 고통만 있으면 그는 범인이요 비신앙임을 배우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