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안식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가 생각할 부분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쉽게 표현하는 말 가운데
하느님께 벌을 받는다는 것이 있습니다.
잘못에 대한 벌을 받아 고생한다는 생각이
바탕에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창세기가 이야기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
노동과 출산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말씀은
다르게 들립니다.
고통을 주시는 하느님과
안식을 주시는 예수님이
서로 다른 분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구약의 하느님과
신약의 하느님이 서로 다른 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부분은 한 분 하느님이라는 유일신 신앙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구약의 하느님과 신약의 하느님이
서로 다르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하다보니
사람들은 어느 한 쪽을 취사 선택하기도 합니다.
누구는 고통을 주시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누구는 안식을 주시는 하느님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대부분은
고통을 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선택합니다.
성경이 두 모습을 다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은 변덕쟁이로 보이기도 합니다.
이 두 모습은 정의와 사랑의 충돌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정의의 하느님과 사랑의 하느님은
서로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정의와 사랑은
하느님 안에서 서로 다른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면서도
잘못에 대한 죄값을 당신 아들의 죽음으로
하느님께서 직접 치르시는 것을 보면
옳고 그름을 따지는 정의는
대신 값을 치러주시면서 용서해 주시는
사랑과 연결됩니다.
즉 인간이 죄를 지어 고통을 겪게 되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고통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에덴에서 쫓겨나는 인간에게
옷을 만들어 주십니다.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논리적인 것이 최고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물론 이성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좋은 선물입니다.
그럼에도 그 이성은 이해되지 않는 것을
쉽게 거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모습이 일치하지 않는 상황에서
취사 선택을 하면서
하느님의 본래 모습,
혹은 하느님의 원래 의도에서
멀어지기도 합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그 부족함에서 오는 고통을
하느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 하느님께 우리의 부족함을 맡겨드려도 괜찮습니다.
온유하고 겸손하신 하느님을
오늘의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