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파견의 목적입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복음 곧 기쁜 소식인데
그런데 하늘나라라 가까이 온 것이 과연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요 기쁜 소식일까요?
슬프게도 그 기쁜 소식은 많은 사람에게 희소식이 아니고
오히려 슬픈 소식이거나 아주 듣기 싫은 소식입니다.
쉬운 예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죽을 날이 가까이 왔다,
하느님께 돌아갈 날이 가까이 왔다는 말과 다른 말이 아니라면
그 말을 듣고 바로 기꺼워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혹 하늘나라가 가까이 온 것이 꼭 종말론적인 의미가 아닐지라도
제 생각에 그것을 좋아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세우는 그런 의미일지라도
그것은 지금까지 유효했던 이 세상 방식이나 가치들을 다 폐기해야
하는 것이기에 기꺼워할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우선 하늘나라 방식은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는 오늘 주님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이 방식대로 하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가진 것은
다 하느님께 거저 받은 거라는 믿음이 있어야 하고,
받은 것을 거저 나누려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만일 거저 주지 못한다면 아직 이 믿음과 사랑이 없는 것이고
여전히 이 세상 방식과 가치대로 살려는 것이겠지요.
두 번째 하늘나라 방식은 파견되어 떠날 때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것입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에도 믿음이 있어야 하고 아울러 파견의식과 정체성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파견받아 떠난다는 의식이 있어야 하고,
하느님의 일을 하면 하느님께서 주신다는 야훼이레 믿음이 있어야 하며,
내 사업을 하는 자영업자가 아니라 주님의 일꾼이라는 정체성이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 하늘나라 방식은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마을에 들어갔는데 환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집에 머물고
아무도 환영하지 않으면 발의 먼지를 털고 훌훌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평화의 사도로서 평화롭게 현존하며 복음을 선포하는 방식입니다.
복음 선포라는 것이 사실은 하느님 나라의 평화를 전하는 것인데
힘을 겨루고 싸우는 식이여서는 안 되겠지요.
프란치스코는 이슬람에 가는 형제들에게
바로 이 지혜롭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선교하라고 하였지요.
여건이 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환영하지 않으면 겸손하고 평화롭게 현존하라고 말입니다.
어느 날 길 가는데 할머니 한 분이 “예수 천당, 불신 지옥”하며 고래고래 소리쳤고,
이에 마주 오던 할아버지가 시끄럽다고 하니 그 할머니는 대뜸
“당신도 지옥” 이렇게 대꾸하는 거였습니다.
천당 얘기만 하면 되고 지옥 얘기는 할 필요 없습니다.
천당의 행복만 전해주고 지옥의 저주는 입 밖에 낼 필요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