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과 창세기는 공교롭게도 모두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믿으면 두려울 것이 없다고 공통적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제가 요즘 자주 얘기하듯 제대로 믿어야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데 심판자 하느님으로만 믿으면
두려움이 오히려 더 커지고 더 많아질 겁니다.
탈란트의 비유에서 한 탈란트를 받은 사람이 그러했지요.
그는 하느님을 뿌리지도 않고 거둬가는 모진 악덕기업가로 믿었기에
받은 탈란트를 그대로 땅속에 묻었잖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을 믿되 오늘 주님 말씀처럼 믿어야 합니다.
“참새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않게 하는 믿음은, 하느님은
늘 나의 곁에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시라는 믿음과
나를 다 알고 계시기에 위험에서 구출해주시는 하느님이시라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하되 제대로 두려워해야 합니다.
특히 오늘은 성 보나벤투라 축일이니 지혜로운 두려움을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혜로운 두려움 1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은 이 세상 목숨을 뺏을 수는 있어도 영원 생명은 어쩌지 못하는데
하느님은 이 세상 목숨과 영원한 생명을 다 좌지우지하시기 때문입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지혜로운 두려움 2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아닌 계신 것을 두려워한다.
살다 보면 고통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내가 고통스러울 때 내 곁에 아무도 없는 것이 두려움입니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죽을 때 아무도 없는 것이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내 고통과 죽음에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두려움보다
더 큰 두려움이 실은 사랑하는 하느님께서 아니 계신 두려움입니다.
지혜로운 두려움 3
악을 두려워하지 않고 죄악을 두려워한다.
고통은 악의 경험 곧 우리가 싫어하는 것을 겪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통은 우리를 교만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영적으로 성숙케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숙하고 지혜롭다면 고통 가운데서 사랑할 수 있어야 하고,
더 나아가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고 악의 경험인 고통을 사랑할 것입니다.
반대로 모든 것이 편안할 때 하느님을 찾지 않게 되고
하느님과 멀어지게 되는 그 죄악을 두려워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