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가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였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합니다.
배가 고프기 때문이고,
이집트에선 노예로 살아도 배는 불렀는데 광야에선 배가 고프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을 보면서 남의 일처럼,
나는 그렇지 않은 양 이들을 비판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사는 동안 얼마나 불평이 많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불평에 대한 성찰과 반성을 오늘 해야겠습니다.
먼저 볼 것은 불평은 불행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행복한 사람의 입에서는 결코 불평이 나오지 않습니다.
불행하거나 적어도 행복하지 않은 사람에게서 불평이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왜 행복하지 않고 더 나아가 불행합니까?
그것은 불만 때문이고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또 왜 불만이고 왜 만족할 줄 모릅니까?
그것은 욕구는 한계가 없고 능력은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능력에 한계가 있는데도 욕구는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행복하려면 만족의 비법을 알아야 하는데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곧 하나는 인간적인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의 방법입니다.
먼저 인간적인 방법을 보면 능력에 한계가 있는 만큼 욕구를 없애거나,
욕구를 없앨 수 없다면 욕구가 욕망이나 욕심으로 발전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배고파도 화내거나 불평하지 않고
능력이 없고 가난한 자신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겁니다.
다음으로 우리 신앙인은 신앙적인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은 하느님으로 만족하거나 하느님의 도움으로 만족할 줄 아는 것입니다.
곧 배고프면 인간에게 불평하지 않고 하느님께 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반대의 짓을 합니다.
기도해야 할 입으로 불평을 하는 겁니다.
하느님께 향하지 않고 인간에게 향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또 반성해야 할 것은 이집트를 그리워하는 점입니다.
배고프다고 배불렀던 이집트를 그리워하는 것 말입니다.
복지 곧 행복의 땅인 가나안을 그리워하지 않고,
배고픔 때문에 노예의 땅인 이집트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배고픈 철학자보다 배부른 돼지가 낫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단식하시고 돌로 빵이 되라는 유혹을 광야에서 받으실 때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에게서 오는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처럼 하느님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빵 문제에만 관심이 있어서 하느님 말씀의 좋은 밭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불평 성찰을 한 우리는,
지상에 살면서도 천상의 행복을 그리워하고
배고파도 하느님과 하느님 말씀으로 만족할 줄 아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