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와 오늘 연일 보지만 그리고 내일도 보게 되겠지만,
민수기의 이스라엘 백성은 아주 문제적인 인간들입니다.
불평불만이 많고,
그러니까 욕심이 많고,
그러면서도 자신감은 형편없습니다.
있어야 할 것은 없고 없어야 할 것은 많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의 여인과 비교할 때
있어야 할 것은 무엇이고 없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겸손과 믿음과 사랑의 열정은 있어야 하고,
교만과 불신과 패배주의적 자포자기는 없어야 합니다.
이면에서 역전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뽑으신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겐 없어야 할 것만 있고,
그들이 개무시하는 가나안 여인에게는 있어야 할 것이 있다는 면에서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주님께서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방인을 무시할 때 흔히 쓰는 표현으로
가나안 여인의 자식을 강아지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우리말로 하면 개새끼지요.
그런 개새끼가 하느님 선민보다 낫고 선민이란 자들이 개새끼만도 못한 겁니다.
오늘 가나안 여인은 강아지 소리를 들어도 그렇다고 합니다.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나”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인의 이 '그러나'에서 겸손만큼이나 강한 믿음을 느낍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강아지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참으로 겸손하기에 모욕당해도 위축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참사랑에 대해서는 믿음이 있고 은총에 대해서는 확신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스라엘 사람들과 비교하면
나는 비록 강아지지만 ‘그러나’ 주님 사랑은 참되시기에
주님께서는 강아지에게도 은총을 베푸실 거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이에 비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을 메뚜기라고 비하합니다.
이것은 자기 비하이고 터무니없는 과소평가지 겸손이 아닙니다.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도 교만이지만 실은 과소평가도 교만입니다.
교만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둘 다 나왔다는 뜻입니다.
어제도 프란치스코가 말하는 겸손을 소개했지만
우리가 겸손하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다면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모든 것을 다 부정하지 않습니다.
나의 약점과 단점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나를 통째로 부정하지 않고 장점도 있음을 볼 것입니다.
나의 약함을 보고 인정하지만
나는 할 수 없다고 지레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미천함과 죄스러움을 보지만
주님의 참사랑을 믿기에
은총과 구원에서 배제되었다고 지레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메뚜기이기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지 않고,
강아지라도 아주 작은 사랑을 크게 누리는,
그런 겸손과 믿음과 은총의 사람들이 되기로 마음먹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