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오늘 라우렌시오 축일에 독서와 복음은 모두 씨앗 얘기를 들려줍니다.
그것은 라우렌시오 성인이 밀알 하나와 같은 존재였고,
씨앗을 많이 뿌린 사람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둘 다 라우렌시오 성인을 씨앗에 비유하여 얘기하는데
복음은 라우렌시오 성인이 바로 밀알 그러니까 씨앗이었다는 얘기인 데 비해
독서는 씨를 많이 뿌린 곧 선행 실천을 많이 한 분이 라우렌시오 성인이라고
얘기하는 점이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씨앗이든 자기 선행이 씨앗이든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 공통의 목적입니다.
뒤집어 얘기하면 열매를 많이 맺지 못하는 씨앗은
씨앗이 아니거나 불량 씨앗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오늘 라우렌시오 성인을 묵상하고,
저 자신에 대해서는 반성합니다.
라우렌시오 성인은 순교하였으니 진정 밀알 하나였고,
교회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줬으니
씨앗을 많이 뿌린 분이었고 그래서 많은 열매를 거둔,
다시 말해서 로마 교회를 굳건히 하고 확장한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얘기해도 되는지,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다고 얘기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왜냐면 저를 보고 수도원 들어온 사람 하나도 없고,
제 조카들 가운데도 수도자나 재속 프란치스칸이 된 놈이 없으며,
저를 보고 세례받았다고 하는 사람 별로 없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자위하는 차원일지 모르지만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는 것은 아니고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저인데,
그렇다면 라우렌시오 성인과 비교하여 왜 저는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할까요?
사랑 차이겠지요.
죽도록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적당히 사랑하는 차이,
전부를 내어주는 사랑과 일부를 내어주는 사랑의 차이,
보상을 바라지 않는 사랑과 바라는 사랑의 차이,
섬기는 사랑과 시혜적인 사랑의 차이, 뭐 이런 거지요.
알면 됐습니다.
하면 됩니다.
이제부터 하면 되는데
다 욕심부리지 않고 라우렌시오 성인처럼,
이웃을 보물로 여기는 것부터 시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