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오늘 복음은 몇 번 용서해주어야 하는지, 일곱 번이면 되는지에 대한
베드로의 질문에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주라는 주님의 대답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과 응답은 어제 주님 말씀과 이어지는 것일 겁니다.
어제 주님께서는 내게 잘못한 사람을 위해, 어쩌면 원수를 위해
교정과 용서와 기도를 해줘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지요.
그러니까 어제 주님께서 용서해주라고 하시니
오늘 베드로가 몇 번 해줘야 합니까 하고 묻는 것이겠습니다.
그런데 일곱 번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하고 묻는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주라고 하시는데
이 ‘일흔일곱 번까지라도’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용서의 횟수를 여쭙는 베드로에게 주님도 횟수로 대답하신 것이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제 생각에 이것은 몇 번을 교정해줘야 하는지와 같은 문제입니다.
어제 주님께서는 형제의 잘못을 교정해줘야 한다고 하셨는데
몇 번 교정해줘야 하겠습니까? 일곱 번 충고하고 일곱 번 교정해주면 되겠습니까?
이에 대해서도 주님께서는 마찬가지로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다시 말해서 그가 교정될 때까지 끝까지 교정해주라고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몇 번 충고했는데도 또 같은 잘못을 범하면,
여러 번 용서해줬는데 또 같은 죄를 저지르면
그 교정과 용서를 포기하고 싶고 실제로 포기하기도 합니다.
내 입맛 아프다고 하고,
내 입맛 더러워진다고 하며 포기하는데
이것을 사랑과 연결하면 사랑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일곱 번짜리입니다.
아니, 많은 경우, 우리의 사랑은 일곱 번짜리도 못 됩니다.
이에 비해 주님의 사랑은 몇 번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끝이 없습니다.
최후 만찬 때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라고 하는데
여기서 ‘끝까지’는 당신이 돌아가실 때까지라는 뜻도 되겠지만,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사랑을 뜻하는 것일 테고,
배반했던 제자들 곧 당신을 버리고 도망친 제자들이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완전히 다시 돌아올 때까지일 것입니다.
아무튼, 주님의 사랑은 포기를 모르는, 끝이 없는 사랑이고,
우리에게도 몇 번을 세지 말고 끝까지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비유는 용서의 또 다른 차원을 얘기합니다.
우리의 용서는 인간적인 용서가 아니라 신앙적인 용서, 곧
하느님 용서의 체험에 바탕을 둔 용서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간끼리 용서하다 보면 용서가 한계에 부닥칠 것입니다.
일곱 번 정도 용서하고 나면 더 이상 용서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내게 해주신 용서를 생각하면,
앞서 봤듯이 끝까지 수없이 용서해주신 그 용서를 생각하면,
내게 범한 그의 작은 죄를 용서하지 않을 수 없고,
한두 번의 용서로 그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께 범한 나의 죄는 그가 내게 범한 죄보다 더 크고,
하느님께 범한 나의 죄는 그가 내게 범한 죄보다 더 많지요.
그런데도 그 많고 큰 죄를 다 용서받았고 지금도 용서받고 있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면 오늘 비유의 무자비한 종처럼 용서 못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과 용서에 자주 실패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체험하지 못했거나
체험했더라도 그것을 자주 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아무튼, 하느님 용서의 그 물줄기에서 물을 대는,
그런 우리의 사랑과 용서가 되어야 함을 깨닫고 명심하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