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오늘 독서는 여호수아기의 마지막 장입니다.
어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얼마나 좋은 것을 많이 베풀어 주셨는지
장황하게 얘기한 여호수아는 이제 자기 삶과 역할을 마감하면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섬길 것인지 다른 신을 섬길 것인지 선택하라고,
그것도 오늘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택하라고 촉구합니다.
저는 오늘 여호수아의 촉구를 들으면서
‘오늘 선택’하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그런데 선택하라는 것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진정 선택의 자유가 있는 것입니까?
말로만 선택이지 실제로는 어찌해야 할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그런 면이 있고 또 그래야 우리 인간 입장에서는 마땅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분명 우리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그 자유의지로
당신을 선택할 수도 있고 떠날 수도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종처럼 비굴하게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자유가 있는 존재로서 사랑으로 섬기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귀인이 되게 하시고 당신은 귀인의 사랑을 받고자 하심입니다.
우리도 사랑을 받는다면 종의 사랑보다 귀인의 사랑을 받길 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선택하라고 촉구하는 것은 여호수아입니다.
그래서 이것의 의미는 다릅니다.
제 생각에 이것은 너희가 다시 선택하라는 말이고,
부모와 조상의 선택에 떠밀려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너희의 선택으로 새롭게 다시 섬기기 시작하라는 것일 겁니다.
예를 들어 부모의 선택으로 신자가 되거나 부모의 권유로 수도원에 들어온 경우
자녀들이 성인이 되어 성당을 멀리하거나 수도원 성소의 갈등을 겪게 되는데
저는 이것이 오히려 잘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복음의 비유에서처럼 ‘예’라고 하고는 포도밭에 가지 않은 아들보다
‘싫다’라고 했지만 뉘우치고 포도밭에 가는 아들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부모의 선택, 조상의 선택이 아니라 자기의 선택이어야 하고,
그것은 자기의 자유로운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오늘’이라는 말을 강조합니다.
과거 조상들이 어떠했어도 오늘 네가 새로이 결정하고 선택하라는 것이고,
또 나의 결정으로 하느님을 섬겨왔더라도 오늘 다시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이 경우, 오늘 선택하라는 것의 의미는
사랑의 타성을 깨는 의미이고 사랑을 갱신하는 의미입니다.
이는 한번 결혼했으니 사랑 없이도 남편과 아내로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아내와 남편을 매일 다시 선택하고 새롭게 사랑하기로 마음을 먹음으로써
타성적으로 사랑하지 않고 오늘 다시 사랑하기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뭐든지 갱신하지 않으면 타성에 젖기 쉽기에
세례를 갱신하고,
서약을 갱신하고,
혼인을 갱신하라는 일깨움을 여호수아로부터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