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부자 청년이 당신을 따르라는 주님의 초대를 거절하고 떠난 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놀라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오늘 저는 이 말씀이 특별히 눈에 들어오며 이어 이런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받을 수 있는가? 라는 말은 본래 가능성을 얘기하는 것이지만
받을 수 있는 능력을 얘기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묵상 말입니다.
예를 들어 투수가 던지는 공을 받을 수 있냐고 얘기하는 것은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를 얘기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받는 것도 하나의 능력입니다.
구원을 받는 것.
도움을 받는 것.
사랑을 받는 것.
위로를 받는 것.
이런 것이 다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또 하나의 예로 만일 구원과 도움과 사랑과 위로를
구원과 도움과 사랑과 위로라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그 반대의 것으로 오해하면 받을 수 없겠지요.
하느님의 구원과 도움과 사랑의 손길을 우리는
오늘 판관기의 기드온처럼 얼마든지 오해할 수 있지요.
오늘 기드온은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시자
이스라엘이 겪고 있는 고통과 불행을 들먹이며
“지금은 주님께서 저희를 버리셨습니다.”라고
답함으로써 구원을 버림이라고 오해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구원도 사랑도 도움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
받을 능력이 있는 사람이 받는 것인데 자격과 능력이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첫째로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사람을 믿건 하느님을 믿건 믿는 자가 받을 자격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사람을 믿지 못하다가 하느님도 믿지 못합니다.
이 사람도 믿지 못하고 저 사람도 믿지 못하고 하다 보니
믿지 않는 것이 그의 천성처럼 되어버렸고,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하느님도 믿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원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구원과 도움을 원하는 사람이 받지,
원치 않거나 다른 사랑과 구원과 도움을 원하면 받지 않을 것입니다.
셋째로 버리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구원과 도움이 아닌 다른 사랑과 구원과 도움은 버리는,
그래서 하느님 사랑과 구원과 도움을 원하는 사람이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버리는 사람이 받는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