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오늘 루카 복음의 행복 선언은 마음의 가난이 아니라
그저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면에서
그리고 불행 선언과 병행된다는 면에서 마태오복음의 행복 선언과 다릅니다.
그럼으로써 가난과 부를 마음이나 정신에 국한하지 않고,
마태오복음에 비해 물질적 가난과 부를 강조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하게 됩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가르는 기준이 무엇인지.
돈이 많고 적음인지,
돈이 많고 적음이라면 얼마가 그 기준인지.
그런데 주님께서는 한 번도 그런 기준을 제시하신 적이 없습니다.
아니, 제시하시긴 하셨습니다.
그러나 돈은 아니고 하느님 나라 바로 그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행복,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돈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명예나
이런 것들이 많음을 행복으로 여기는 사람은 부자이고,
이런 것들이 많아서 하느님 나라에 관심조차 없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그러니 가난한 사람은 그 반대지요.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이 없기에 저세상에서 부자 되기를 바라고,
저세상에서 부자 되고 싶기에 이 세상에서 가난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 가난한 사람들은 오늘 콜로새서가 권유하는 대로 사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오늘 콜로새서는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추구한다는 것,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한다는 것에 대해 좀 생각해봄이 좋을 것입니다.
추구한다는 것은 집착하는 것과 비교하여 좋은 의미입니다.
이상과 현실의 문제에서 이상을 추구하는 것은 좋습니다.
반면에 집착한다는 것은 미움과 불행의 뿌리이니 나쁩니다.
그런데 이상에 집착하는 것이 왜 나쁩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나 우리 공동체가 이상적이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것이며,
그래서 이상에 비추어 현실을 거부하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추구는 현실을 인정하고 현실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인정하는 것을 넘어 현실을 긍정하는 것이요,
지금도 좋지만 그렇게 되면 더 좋겠다는 매우 긍정적인 태도입니다.
우리가 저 위에 있는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늘 주장하듯 땅에서 하늘을 살자는 것이요,
땅에서부터 하늘을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이 아니고,
이 세상을 미워하고 저세상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시작하여 저세상에서 완성하자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행복이 궁극적 목적이기에
이 세상 행복에 안주하지도 않지만
이 세상 행복을 포기하지도 않으며
저세상에서의 완성을 꿈꾸며 한걸음 씩 나아가는 것입니다.
양다리 걸치기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발은 늘 현실에 있어서 한발은 현실을 딛고 한발은 앞으로 나아가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