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
2023년 10월 4일 수요일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7-58)
주님께서 그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그를 꾸짖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바로잡아, 덕의 길을 걷고자 하는 마음이 잘 자라 더욱 뜨거워지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 이 말씀의 참뜻이 바로 이어 나옵니다. ‘들짐승에게도 굴이 있고 새들에게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나는 보통 사람들이 바라는 그런 장소도 내줄 수가 없다. 나는 머물러 쉴 곳도 머리를 기댈 곳도 없다.’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면 이 말씀에 담긴 은밀한 상징을 알아볼 것입니다. 여우와 하늘의 새는 교활하고 부정한 권능들로, 악마의 무리를 뜻하는 듯합니다. 주님께서 진짜 여우나 새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사람 마음에 떨어진 씨를 채 가서 사람들이 열매 맺지 못하게 하는 사악한 영들을 두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이지요.
우리 안에 여우의 굴과 새들의 보금자리가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들어오실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쉬실 수 있겠습니까?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본서의 목적과 특징
엑카르트의 사상에서 드러나는 성서적 토대를 복원하기에 앞서, 나 자신의 일화룰 소개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나는 수년간 엑카르트의 저작 읽기를 주저했다. 왜냐하면 엑카르트를 연구하는 수많은 주석학지들이 내게 이련 말을 했기 때문이다: “엑카르트는 본디 신플라톤주의 신비가였습니다"
나는 베트남 전쟁으로 대표되는 1960년대에, 곧 서양 문명의 도덕적 · 영적 쇠퇴기에 성년이 되었다. 나는 서양 영성의 역사를 개관하고 싶었고, 토마스 머튼은 그런 나에게 파리 가톨릭 대학으로 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파리 가톨릭 대학에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나는 서양이 필요로 하는 궁극의 것은 신플라톤주의라고 확신했다. 서양은 영성을 일신할 마지막 범주로 영혼과 육을 대립시키고, 남성과 여성을 대결시키고, 지성과 창조성을 대립시키고, 신비주의와 정치를 대립시키는 이분법을 더욱 필요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찾고 있던 것은 히브리 성서의 창조신학으로 대표되는 성서적 전통이었다. 나는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이 이것을 찾아 헤매고 있다고 확신했다. 내가 펴낸 모든 출판물은 물론이고, 문화와 영성에 관한 나의 박사 학위 논문인 <미국이라는 종교>의 출판으로 시작되어 전개된 나의 영성신학에는 이러한 확신이 깔려 있다. 독자들은 이것을 성숙하고 비판적인 기도에 대하여 연구한 나의 책 <음악적이고 영감 넘치는 곰이 되어>J와 일상적인 신비 경험을 예언자적인 맥락에서 연구한 <야, 신난다! 우리는 작지만 줄곧 집에 있었단다>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스스로 엑카르트의 존재를 알아낸 것은 <음악적이고 영감 넘치는 곰이 되어>를 출판한 뒤였다.(29)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10월 1주간
금주간 성서읽기 1코린 3-8장
금주간 생태 행동
<생태 돌봄 주간>
자신. 이웃. 동물과 식물. 자연환경
개인 혹은 공동체 차원에서 먼저 하루를 정해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2기 : 700 ∼ 1050년
제 5절: 오토 대제와 서구 황제권의 갱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토의 교회정책은 이후에 초래될 혼란 상태의 징후를 지니고 있었고, 당시에도 그 위험성을 지적한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다.
교회의 개혁사상에서 대표자인 마인츠의 프리드리히 대주교는, 교회를 세속화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탓에 이 혁신을 단호하게 반대하였다. 실제로 오토가 주교직 구성에 영향을 미치고 주교좌와 수도원장직을 수여하는 권한을 자신의 권리로 주장한 것은, 주교직에 대한 국왕의 높아진 관심과 부합하는 것이었다. 교회법상의 선거는 그의 치세하에서는 단순한 형식이 되어버렸다. 국왕이 주교직 후보자를 결정하고, 그에게 교구를 양도하는 표시로 주교 지팡이를 넘겨주었다. 하인리히 3세 때부터는 주교 반지도 주었고, 봉토를 받은 데 대하여 복종의 맹세를 받았다. 10세기에 이 방법 때문에 감정을 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주로 클뤼니 수도원 개혁 운동에서 시작된 교회정신의 각성과 더불어 국왕의 간섭이 교회 자유의 제한으로 느껴지게 되었다. 교회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평신도에 의한 성직 서임을 단죄하는 것이 곧 주요 공격점이 되었고, 또한 그것은 교황권과 황제권 사이의 최초의 격렬한 대결에 불을 붙이게 되었다.
제국에서 오토의 권력은 아욱스부르크 근처의 레히 평야에서 헝가리인들로부터 대승(955.8.10)을 거둠으로써 더욱 강력해졌다. 이로써 그는 독일을 헝가리인의 무서운 재난으로부터 영원히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자기지신을 위해서도 더 높은, 즉 황제 지위를 획득하기 위한 길을 개척하였다. 카를 대제에 의하여 기초된 서방 황제권의 재건이 955년 이래 목표로서 오토의 눈앞에 보였다.(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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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EMTP(Ecology Maria Theotokos Platform)
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은 순례와 피정을 통한 에페소 성모님 성지 보존과 중동평화와 생태적 회심을 지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