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그러므로 우리는 충만한 선, 모든 선, 완전한 선, 참되시고 으뜸선이신
우리 창조주이시고 구원자이시며 홀로 진실하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우리는 원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말며, 마음에 들어 하지도 즐거워하지도 맙시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우리를 방해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우리를 하느님과
떼어 놓지 못하고, 아무것도 우리를 가로막지 못하기를!”(미 인준 회칙 23장)
저는 오늘 이 두 말씀으로 프란치스코 대축일 강론을 하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야말로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를 잘 알고 찬미한 성인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이 선이라는 것은 우리도 다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선이 아니라면 그런 하느님은 악마지
무슨 하느님이냐고 우리는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선신이니 악신이니 하는 관념이 있고,
이런 관념 차원에서 하느님이 선이시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또는 어떻게 좋으신지 이해하는 것은
체험하지 않고는 불가하고 좋으신 하느님을 내가 좋아하지 않으면 불가합니다.
이 말은 관념적인 선은 하느님이 계시지만 부산에 계시고
지금 내게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게 소용이 없는 것이라는 말이고
아무리 좋으신 하느님이어도 내가 좋아해야지 내게 좋으신 분이라는 말입니다.
키다리 아저씨가 좋은 분이라고 아무리 떠들어도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면 아무 소용없고,
스마트폰이 아무리 성능이 좋아도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면 아무 소용없지요.
사실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은 처음부터 내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좋아하는 타입은 변화합니다.
어렸을 때 좋아하는 타입이 커서까지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기 십상이고,
그래서 어렸을 때 그것을 좋아했다는 것에 웃음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좋으신 하느님을 나도 좋아하려면 내 좋아하는 타입이 바뀌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로 말하면 이것이 바로 맛의 변화 곧
달콤했던 것은 입에 쓰게 되고 쓴 것은 달콤해지는 맛의 변화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유언에서 이렇게 말하지요.
“주님께서 나 프란치스코 형제에게 이렇게 회개를 시작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죄 중에 있었기에 나에게는 나병 환자들을 보는 것이 쓰디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 친히 나를 그들 가운데로 이끄셨고 나는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자비를 실행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쓴맛이었던 바로 그것이 도리어 몸과
마음의 단맛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얼마 있다가 나는 세속을 떠났습니다.”
그러므로 관건은 어떻게 이런 입맛의 변화가 일어나느냐 그것입니다.
더욱이 영적인 것이 맛있어지는 맛의 변화가 어떻게 가능하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는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을 겁니다.
맛있어지는 것은 맛 들이기 나름이고,
맛 들이는 것 특히 싫어하는 것을 맛 들이는 것은 반복의 문제라고.
싫어서 입에 대지도 않던 고수를 계속 먹게 되면 차츰 맛 들이게 되지요.
그러므로 다시 여기서 관건은 쓴 것을 맛 들여야겠다고 마음먹는 것인데
쓴 것을 맛 들이기로 마음먹는 이 단계에서는 보통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싫어하는 맛을 들이는 것이나 싫어하는 사람을 들이는 것이 같기 때문입니다.
사람이건 맛이건 싫어하는 것을 들이는 것 곧 들어오도록 허용하는 것은 싫고,
그래서 처음에는 억지로 허용하기 마련인데 하느님께서 그리 만드시는 겁니다.
하느님께서 그 싫어하고 두려워하던 나병환자를 만나고 끌어안게 하시듯 말입니다.
그런데 나병환자를 포옹한 것은 단지 나병환자를 포옹한 것이 아니라
그 싫고 두려운 나병환자를 포옹하게 하신 하느님과 포옹한 것이고,
그 하느님을 좋으신 하느님으로 포용한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에게는.
그래서 쓰고 쓴 것들이 달고 달콤해진 뒤에는 하느님도 달고 달콤해졌고,
맛보고 맛볼수록 하느님이 더 달고 달콤해졌습니다. 그에게는.
그래서 좋으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원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마음에 들어 하지도 즐거워하지도 말자고 한 다음 이렇게 권고합니다.
“감미로우신 분, 사랑할 만한 분, 좋아할 만한 분, 온전히 모든 것에 앞서
세세 영원히 바랄 만한 분”을 “사랑하고, 공경하고, 흠숭하고, 섬기고,
영광을 드리고, 드높이고, 찬송하고 감사드립시다.”라고 권고합니다.
프란치스코처럼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님이 얼마나 좋은지 맛보고 깨달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