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오늘 복음은 일흔두 제자가 파견되는 내용으로서 루카 복음에만 있는 얘깁니다.
그렇다면 왜 루카 복음은 열두 사도 파견 얘기 말고도
일흔두 제자 파견 얘기를 굳이 덧붙이는 것일까요?
실제로 일흔두 제자를 주님께서 더 파견하신 걸까요?
아니면 루카 복음사가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지어낸 얘기일까요?
알 수 없지만 그리고 사실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사실을 따질 것이 아니라 의미를 따져야 할 것입니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은 이방인 선교를 특별히 염두에 두지 않았고, 마태오복음은
특히 더 유대인 선교만 생각했기에 열두 사도 파견 얘기만 전하면서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만을 찾아가라는 얘기까지 하지요.
이에 비해 루카 복음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쓴 복음이기에
열두 사도 말고도 이방인을 위한 더 많은 선교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추수할 것이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일꾼을 더 보내달라고 청하라는 말씀을
다른 두 복음과 달리 일흔두 제자 파견 얘기에 집어넣습니다.
그러니까 루카 복음은 열두 사도는 유대인을 위한 선교사로,
일흔두 제자는 이방인을 위한 선교사로 생각한 것일 겁니다.
그렇지요.
유대인만 생각해서는 안 되지요.
유대인들이 먼저 복음화되고 유대인들이 이방인을 복음화하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유대인들만 복음화하는 것은 실제 주님 뜻이 아니라는 것이 루카의 생각일 겁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께서 “가거라”라고 하신 것은 가까이서부터 멀리까지,
내 가정부터 가까이는 이웃에게 멀리는 세상 끝까지 가라는 명령이고,
일흔두 제자에게뿐 아니라 지금 이곳의 우리에게도 하시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명령이 우리에게 명령입니까?
주님께서 명령하시는데 그 명령이 우리에게 명령이긴 합니까?
명령이고 우리에게 하시는 명령이라면 우리가 따라야 하는데,
명령이긴 하지만 우리에게 하시는 명령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아무리 주님 명령일지라도 나는 명령에 따를 수 없다고 버티지는 않습니까?
어쨌거나 가라는 명령 앞에서 나는 어떤 나인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