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작은형제회? 멋있는 작은형제회?’
+평화를 빕니다.
오늘 복음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처음 부분은 멀쩡한 몸으로 지옥에 가는 것 보다 불구자로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이 더 나은 것임을 말하는 부분입니다.
즉 죄를 단호하게 물리치라는 부분입니다.
두 번째 부분은 소금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두 가지 이야기 중에서 두 번째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두 번째 이야기를 하기 전에 피천득 씨가 쓴 맛과 멋이라는 글을 먼저 나눌까 합니다.
맛은 감각적이요 멋은 정서적이다
맛은 적극적이요 멋은 은근하다
맛은 생리를 필요로 하고 멋은 교양을 필요로 한다
맛은 정확성에 있고 멋은 파격에 있다
맛은 그때뿐이요 멋은 여운이 있다.
맛은 얕고 멋은 깊다
맛은 현실적이요 멋은 이상적이다
정욕 생활은 맛이요 플라토닉 사랑은 멋이다
그러나 맛과 멋은 반대어는 아니다
사실 그 어원은 같을지도 모른다
맛있는 것의 반대는 맛없는 것이고
멋있는 것의 반대는 멋없는 것이지 맛과 멋이 반대되는 것은 아니다
맛과 멋은 리얼과 낭만과 같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맛만 있으면 그만인 사람이 있고
맛이 없더라고 멋만 있으면 사는 사람이 있다
맛은 몸소 체험을 해야 하지만 멋은 바라보기만 해도 된다
맛에 지치기 쉬운 나는 멋을 위하여 살아간다.
오늘 복음의 두 번째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소금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소금을 먹으면 짠 맛이 납니다. 왜냐하면 소금은 짜기 때문입니다.
이 짠 맛이 소금의 맛이고, 더 나아가 소금의 멋입니다.
짠 것은 바로 소금의 ‘맛’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무엇도 짜지 않고 오직 소금만이 짠 맛을 가지고 있음 이것이 바로 소금의 ‘멋’입니다.
짠 맛이 바로 소금의 정체성이고 소금의 멋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소금의 멋을 “그러나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맛을 내겠느냐?”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을 하신 뒤에 예수님께서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는 것, 이것이 바로 마음속에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며 살아갈 때 멋이 생깁니다.
바로 마음속에 나만이 할 수 있는 나의 정체성을 발견하는 것, 즉 멋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한 때 저는 사람들에게 저의 맛을 알아달라고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고 싶었고, 누군가에게 잊혀지지 않는 존재이고 싶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을 마치고 머리를 샛노랗게 물들였습니다.
졸업식 때도 검은 머리 가운데 노란 머리였고, 대학교 입학 때도 검은 머리 가운데 노란 머리였습니다.
저는 노란 머리를 하면 사람들이 저를 더 잘 기억해주고 좋아해줄꺼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노란 머리를 한 저를 보고 저의 맛을 알아주기는 커녕 다름을 넘어 틀린 눈으로 저를 바라보았고 대했습니다.
그렇게 생활을 계속하다가 머리를 뽀글머리로 파마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생활을 계속하다가 검은 머리를 다시 평범하게 자르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햇살이 저에게 환하게 비춰졌습니다.
저는 그때 따스한 햇살 속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기억되기 위해서 염색을 하고, 파마를 하고 하지 않아도 나는 하느님 안에서 충분히 특별한 존재이구나.
하느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햇살을 비춰주시는 구나.
그런데 나는 왜이렇게도 무엇인가를 꾸미려하고 치장하려 했을까? 나는 충분히 멋있는데...’
이런 생각을 한 뒤로는 사람들에게 저의 맛을 알아달라고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작은형제회에서 살아갑니다. 작은형제회도 맛과 멋이 있습니다.
작은형제회 수도자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맛’입니다.
수도복을 입고, 매일 기도를 하고 미사도 드립니다.
성프란치스코가 작은형제회를 만들 때의 그 정신대로 사는 것 이것이 ‘멋’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