줬다가 뺏는 것처럼 치사하고 하지 말아야 할 짓은 없을 것입니다.
어린이에게 돈을 줬다가 뺏으면 어떻게 될지 상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이는 울고불고 난리가 날 것입니다.
그것은 숫제 주지 않은 것보다 나쁜 짓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과 같은 것이고,
미성숙한 아이들이나 가끔 하는 짓입니다.
아이들은 친할 때 줬다가 삐지면 도로 달라고 하지요.
연인 간에도 그런 경우가 있다고 하지요.
좋아서 사랑할 때 패물을 선물했는데 싫어 헤어지면서 도로 달라고 한다지요.
아무튼 선물을 도로 달라고 하는 것은 사랑을 거둔다는 뜻이겠지요.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런 분이 아니라고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은 사랑을 포기할 줄 모르는 분이시라는 말과 같은 말이고,
실로 포기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나 성숙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지요.
그런데 보답을 바라는 사랑도 진정한 사랑이 아니고 성숙한 사랑이 아니지요.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는 보답할 수 없는 가난한 이를 잔치에 초대하라고 하시며
더 나아가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실로 성숙한 사랑은 엄마가 아이에게 무조건 사랑하듯
보답을 바라고 사랑하지 않고 그저 넘쳐서 사랑하지요.
사랑이 넘쳐서 사랑하기에 보답이 없어도 행복하고,
사랑이 넘치기에 보답이 없어도 결핍이 없습니다.
그러나 보답을 바라는 것은 결핍이 있기에 사랑하는 것이요,
결핍을 채우기 위해 사랑하기에 보답이 없을 때는 불행하고,
사랑은 미움으로 바뀌곤 하지요.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보답을 바라지 않는 참된 사랑에 관하여 이렇게 권고합니다.
"형제가 건강하여 보답해 줄 수 있을 때 그 형제를 사랑하는 만큼,
형제가 앓고 있어 보답을 받을 수 없을 때도 그만큼 형제를 사랑하는 종은 복됩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보답을 바라지 말아야 할 다른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보답을 받지 않고 저세상에서 받을 것이고,
인간의 보답을 받지 않고 하느님의 보답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 저는 저를 반성합니다.
지금까지 저는 나의 사랑으로 자족하는 차원에서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사랑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느님의 보답을 그리 바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앞서 봤듯이, 보답을 기대했다가 보답이 없으면
미워하게 되고, 불행해지는, 그런 내가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어떻게 보면 고차원적인 이기주의이고,
사랑의 인격적 측면이 결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지요.
무릇 신앙인이라면 이웃사랑을 사다리 삼아 하느님 사랑에 도달하고,
다른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만을 보답으로 바라는 사랑을 할 때
성숙한 신앙인이요 행복한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런 사랑을 가르침 받고 꿈도 꾸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