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두 가지 방향의 작용이 있습니다.
받아들임과 내어줌입니다.
먼저 사랑은 타자를 받아들입니다.
사랑은 상대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이해합니다.
사랑은 상대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동의합니다.
사랑은 상대의 처지를 받아들이고 동정합니다.
사랑은 상대의 잘못을 받아들이고 용서합니다.
사랑은 상대의 비판을 받아들이고 감사합니다.
사랑은 상대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회개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은 사랑을 무시하지 않고
사랑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사랑을 사랑합니다.
그런가 하면 사랑은 신기하게도 그 반대의 작용도 합니다.
내어 줌, 증여의 작용과 행위가 그것입니다.
온 마음을 다 쏟아 염려합니다.
온 정성을 다 하여 돌봅니다.
온 힘을 다 하여 돕습니다.
가진 모든 것을 다 주어 타자를 풍성하게 합니다.
사랑은 참으로 다 주고 싶어 하고 그래서 실제로 다 줍니다.
심지어 주고 다 주어 더 줄 것이 없으면 자기 자신마저 전부 줍니다.
오늘 성체와 성혈 축일의 의미가 바로 이것을 기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배고픈 사람들에게 당신이 빵을 주시기 전에
너희가 주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가진 것이 없다고 합니다.
가진 것이 없어서 줄 수 없다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가진 것이 없으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줄 수 있는 것은 가진 자의 특권입니다.
그러나 가진 것이 있다고 다 주는 것은 아닙니다.
많이 가졌어도 줄 수 없는 인색한 사람은 줄 수 없고,
많이 가졌어도 주고 나면 빈털터리가 되는 사람은 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줄 수 있는 것은 풍요로운 자의 특권이고
주고 또 주어도 끊임없이 채어지는 사람의 특권입니다.
윗물이 차단된 물은 아무리 찰랑찰랑해도 흐르지 않고
그래서 결국은 고여 썩어버리지만
위에서 끊임없이 흘러드는 물은 끊임없이 아래로 흘러가도
고갈됨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면에서 주님께서는 윗물을 받아
우리에게 끊임없이 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은 위로부터 축복을 받아 빵을 불리십니다.
나눠주어도, 나눠주어도 빵은 계속 불어납니다.
그 많은 사람이 먹고도 남았습니다.
그래서 가진 것 없었던 제자들이
어떻게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빵을 나눌 수 있는지 보고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빵을 나누는 아름다움이
오늘 2독서의 코린토인들에게는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부자들은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자기들끼리 성당 안에서 배불리 먹고
가난한 사람들은 성당 밖에서 굶주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교회를 꾸짖습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기억하며 빵과 포도주를 먹으면서
어떻게 당신의 몸과 피까지 주신 주님의 사랑을 망각하느냐고 꾸짖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독서에서 보듯이 성체 성사의 의미를 상기시킵니다.
사랑은 자기무화의 창조임을 상기시킵니다.
이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 창조된 모든 조물은
이 사랑의 법칙에서 벗어나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미물조차도 자기무화의 창조와 자기증여의 사랑을 실천합니다.
두꺼비가 그러하고, 살모사가 그러하고, 가시고기가 그러합니다.
그러니 사랑이 있다면 우리도 그렇게 할 거고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다면 줄 수 없을 것이고
그리고 위로부터 사랑을 받지 않는다면 줄 사랑이 없겠지요.
그러니 우리는 쓰고 나면 못쓰게 되는 1회용 배터리가 아니라
언제나 주님 사랑으로 채워지는 충전용 배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