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깨끗한 마음이 아니라 깨끗해진 마음>
어제 예수 성심 축일을 지낸 교회는
오늘 성모 마리아의 성심 축일을 나란히 지냅니다.
모든 것에서 아드님과 함께 하신 어머니를 기리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모 성심에는 <티 없이 깨끗하심>이 덧붙습니다.
동정녀로서 어머니이신 마리아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참에 깨끗한 마음, 특히
성모의 순결한 마음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성모의 순결이 순결주의자의 그 깨끗함이고,
더 나아가 결벽주의자의 그 깨끗함이겠습니까?
그런 것이라면 완벽주의나 성공주의와 마찬가지로 자기 성취적인 것이고,
그런 깨끗함은 우리가 크게 기리며 본받을 필요도 없을 겁니다.
성모의 순결은 자기 성취적 깨끗함이 아니라 인격적 깨끗함이며,
그것도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의 깨끗함입니다.
이것을 수도 전통에서는 봉헌된 정결이라고 하지요.
주님을 위한 정결, 또는 주님께 바쳐진 정결을 말하는 것인데
저는 오늘 인격적 깨끗함의 또 다른 측면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주님의 성전이 되기 위해 깨끗한 마음을 봉헌하는 것도 좋지만
주님을 모심으로 도리어 내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이
더 인격적으로 깨끗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우리의 미사 봉헌기도 중에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께 봉헌하게 하시고,
봉헌할 제물도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신다는 기도가 있는데,
이것은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봉헌하려고 할 때
제물이 어디 있냐고 묻는 이사악에게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마련해주신다고 답한 것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깨끗한 마음을 바치고자 하는 것은
갸륵한 마음이고 그 자체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이 어떻게 깨끗해질 수 있겠습니까?
진실한 참회로 고백성사를 완벽하게 보면 죄가 씻어져서 깨끗해지겠습니까?
이것도 우리를 깨끗해지게 하고 또 정결의 좋은 방편이지만
더 바람직하고 완전한 것은 주님을 모심으로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어제 저는 주님의 거룩함을 얘기하며
우리 죄를 씻어주시는 거룩함이라고 말하였는데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오히려 요르단강물이 깨끗해진 것처럼
주님을 만지고, 주님을 모심으로 우리가 깨끗해지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이사야가 부르심을 받았을 때
입술이 더러운 자기가 어떻게 하느님을 뵐 수 있겠냐고 하자
주님께서 숯불로 그 더러움을 씻어주신 것과 같은 것이지요.
성녀 글라라는 또 이렇게 얘기하지요.
“그분을 사랑할 때 그대는 정결하고,
그분을 만질 때 그대는 더욱 깨끗해질 것이며,
그분을 맞아들일 때 그대는 동정녀입니다.”
그러므로 성모의 깨끗한 마음을 기리는 오늘 저는
깨끗한 마음을 주님께 바치려는 마음을 가져야겠지만
그보다 먼저 주님으로 제 마음이 정결해지기로 마음먹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