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2,41-51)
오늘은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즉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의 마음을 기념하는 날이다.
과연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은 어떠한 마음일까?
복음서가 성모님에 대해서 전해주는 바는 많지 않다. 성모님은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씩 비쳐지는 성모님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이 어떠한 마음인지를 추측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축일을 준비하며 복음을 묵상하면서, 내 마음 속에 계속 울려퍼지는 하나의 격언이 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그 자식이 자신들이 뜻과 다른 길을 간다고 해도 그의 뜻을 결국은 받아들인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것이 죄와 악의 길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데, 사실 현실에서는 자식을 이기고야 마는 부모들도 있지 않은가? 자식을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다. 그러한 부모들도 자식을 사랑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을 위하는 사랑, 자기애일 뿐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요, 욕심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을 버리고, 참으로 상대방을 위하는 길을 찾으며,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상대방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비우는 마음, 희생하는 마음 안에서만 거룩한 사랑이 자리잡을 수 있는 것이다. 성모님의 마음을 일컬어 깨끗하다고 하는 것은 그분이 바로 이렇게 순수하고 비워진 마음으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당신 아들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이며 살아가셨기 때문이다.
먼저, 마리아는 자신이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잉태하는 인간적인 치욕과 그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다가올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을 받아들인다. 당신을 사랑하시고 당신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전능하신 분이시요, 또 그렇게 하심으로써 위대한 일을 이루시고자 한다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이렇게 자신을 비웠다!
그리고 과연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아기가 태어나고, 천사들과 목자들이 일러준 이야기를 듣고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까 2,19). 또, 아들 예수를 성전에서 찾았을 때에도 무작정 화를 내고, 소년 예수에게 복종을 강요하기 보다는, "예수가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지만,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까 2,50-51).
그리고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그분을 찾아나선 어머니를 옆에 두고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하고 반문하시는 당신 아드님의 말씀을 묵묵히 듣고도 서러움이나 모욕감 없이 그저 마음 속에서 예수에게 불행한 일만이 일어나지 않기를 묵묵히 기도하며 방해하지 않고자 짐짓 모른 체 물러나 계시고자 했다(마르 3,21-35 참조).
결국, 당신 아들 예수가 사도 요한을 성모님의 새로운 아들로 맡기시며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고 숨을 거두실 때에도 여느 어머니들처럼 울부짖으며 "안 된다" 고 하기 보다는 그저 마음 속으로 고요히 슬픔을 삭이기만 하셨을 뿐이다. 당신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면서도 자신을 내세울 수가 없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렇게 자식을 이겨 내지 못하는 "못난 어머니", 예수를 사랑하기에 그의 뜻에 온전히 따르며,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비우고 그 자리를 숨죽여 성령으로 채우시는 거룩한 성심의 소유자였다.
오늘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을 지내면서 우리도 마음을 비우고, 하느님의 뜻, 즉 성령으로 그 자리를 채움으로써 성모 성심을 본받기로 하자. 우리가 성모 성심 기념일을 지내는 것은 단순히 "묵주기도" 만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늘은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즉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의 마음을 기념하는 날이다.
과연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은 어떠한 마음일까?
복음서가 성모님에 대해서 전해주는 바는 많지 않다. 성모님은 주인공이 아니라 조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씩 비쳐지는 성모님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이 어떠한 마음인지를 추측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축일을 준비하며 복음을 묵상하면서, 내 마음 속에 계속 울려퍼지는 하나의 격언이 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그 자식이 자신들이 뜻과 다른 길을 간다고 해도 그의 뜻을 결국은 받아들인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것이 죄와 악의 길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데, 사실 현실에서는 자식을 이기고야 마는 부모들도 있지 않은가? 자식을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다. 그러한 부모들도 자식을 사랑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을 위하는 사랑, 자기애일 뿐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요, 욕심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을 버리고, 참으로 상대방을 위하는 길을 찾으며,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상대방의 뜻을 따르는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비우는 마음, 희생하는 마음 안에서만 거룩한 사랑이 자리잡을 수 있는 것이다. 성모님의 마음을 일컬어 깨끗하다고 하는 것은 그분이 바로 이렇게 순수하고 비워진 마음으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며, 당신 아들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이며 살아가셨기 때문이다.
먼저, 마리아는 자신이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잉태하는 인간적인 치욕과 그로 말미암아 자신에게 다가올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을 받아들인다. 당신을 사랑하시고 당신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전능하신 분이시요, 또 그렇게 하심으로써 위대한 일을 이루시고자 한다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이렇게 자신을 비웠다!
그리고 과연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아기가 태어나고, 천사들과 목자들이 일러준 이야기를 듣고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까 2,19). 또, 아들 예수를 성전에서 찾았을 때에도 무작정 화를 내고, 소년 예수에게 복종을 강요하기 보다는, "예수가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지만,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까 2,50-51).
그리고 예수님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그분을 찾아나선 어머니를 옆에 두고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하고 반문하시는 당신 아드님의 말씀을 묵묵히 듣고도 서러움이나 모욕감 없이 그저 마음 속에서 예수에게 불행한 일만이 일어나지 않기를 묵묵히 기도하며 방해하지 않고자 짐짓 모른 체 물러나 계시고자 했다(마르 3,21-35 참조).
결국, 당신 아들 예수가 사도 요한을 성모님의 새로운 아들로 맡기시며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고 숨을 거두실 때에도 여느 어머니들처럼 울부짖으며 "안 된다" 고 하기 보다는 그저 마음 속으로 고요히 슬픔을 삭이기만 하셨을 뿐이다. 당신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면서도 자신을 내세울 수가 없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렇게 자식을 이겨 내지 못하는 "못난 어머니", 예수를 사랑하기에 그의 뜻에 온전히 따르며, 자신의 마음을 온전히 비우고 그 자리를 숨죽여 성령으로 채우시는 거룩한 성심의 소유자였다.
오늘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을 지내면서 우리도 마음을 비우고, 하느님의 뜻, 즉 성령으로 그 자리를 채움으로써 성모 성심을 본받기로 하자. 우리가 성모 성심 기념일을 지내는 것은 단순히 "묵주기도" 만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