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바르나바 사도 기념일(마테 10,7-13)
본당에서 사목하다보면 집이나 차를 축복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런데 경우에 따라서 미처 감사예물을 준비하지 못한 집, 혹은 차 주인이
함께 참석했던 사람의 "코치"(?)를 받고는 당황스러워 하는 경우를 간혹 본다. 또는 반대로 축복식 내내 보란듯이 감사예물
"봉투"를 들고 있는 사람도 있다. 양쪽의 경우 모두 착각하는 것이고, 보다 심각하게 생각하면, 축복의 예식을 모독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될 때가 있다.
축복식은 문자 그대로 하느님께서 은총과 선물로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자리이지, 사제에게 예물을 바치고 "축복을 사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예물을 받아야만 축복식을 한다면, 그것은
축복을 매도하는 것이요, 따라서 시모니즘(simonism: 사도 8,4-24 참조)의 한 형태가 되는 것이다. 이 경우,
축복식을 하는 성직자나 축복식을 청하는 평신도나 하느님과 교회 앞에 심각한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제발 감사예물이 절대적인 것처럼 생각하지 말자!
사제에게 감사예물을 챙겨주지 못하더라도, 무한한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분,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불우한 이웃을 돕는 일을 한다면, 그분께 더욱 큰 영광을 돌려드리는 일이 될 것이다.
유다교의 전통적 가르침을 담고 있는 미쉬나(Mishinah)에 의하면 예수님 시대의 율법학자, 제사장, 그리고 재판관들은 자신들이 하는 행위에 대해 급료를 받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만약 어떤 판사가 돈을 받고 판결을 내린다면 그것은 무효가 되었고, 돈을 받고 한 증인의 증언 역시 무효가 되었다.
제사장에게 돈을 주고 붉은 암소의 재로 만든 정화수 뿌림을 받았다면 그 또한 무효가 되었다.
이들이 하는 모든 행위는 무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했기에 이들의 수입은 주로 기부금으로 이루어졌다.
유다교의 개념에 의하면 종교지도자들이 제공하는 율법과 법률에 대한 해석 또는 종교적인 행위는 백성에게 거저 주는 것이었다. 하느님의 은총을 전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백성은 그에 대한 값을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기부를 한 것이었다.
따라서 종교지도자들은 백성이 바친 "십일조"와 "성전세" 중 구호금으로 할당되는 돈을 받아서 생계를 유지해 나갔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하셨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거저 베푸시는 분이시며,. 그 누구도 하느님께 무엇을 가져다 바치고 그 댓가로서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다. 또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 하느님의 종이 물질적인 것에 억매이게 될 경우 "두 주인"을 섬기게 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며, 무상으로 모든 선(善)을 베푸시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게" 하기 보다는 그분의 이름에 먹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모든 성직자들이나 평신도들이나 다 같이 "모든 선을 말씀해 주시고 이루어 주시는"(프란치스코, 권고 8,3) 하느님께만 감사드리며, "모든 은총과 모든 영광의 샘이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우리는 원하지도 바라지도 말며"(1회칙 23,9), 오히려 그분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다른 이들에게 관대하게 베풀며 살아가는 가난한 자, 겸손한 자가 되도록 하자!
마지막으로, 이 시대의 권력가, 위정자들도 그들이 현재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지존하신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제발 명심하고, 백성들에게 베풀고 나누어 줄 수 있는 지혜를 체득하고 회심하게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