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해야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법이란 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해야만’은 강제성이고 “되는 것”은 가능성입니다.
그러니까 법이란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면 되고 그렇게 안 하면 아니 됩니다.
사용법대로 하면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고,
그 법대로 하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약을 복용법대로 먹으면 우리가 살 수 있지만
복용법을 무시하고 마구 먹으면 독이 됩니다.
그러므로 법은 우리를 구속하는 부담스럽고 부정적인 것만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할 수 있게 하는 고맙고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오늘 “내가 율법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시고,
작은 계명이라도 스스로 지키고 다른 사람도 가르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뜻은 사람들, 특히 율법학자들이
율법을 폐지하러 온 분으로 주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는 하느님의 법을 완성하러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이 아니라
율법을 폐지하려는 과격한 파괴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주님이 무엇을 폐지하려고 하였다면
그것은 율법주의를 폐지하려고 한 것이지
율법을 폐지하려고 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완성하려고 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완성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법에 주님의 영을 집어넣어 법이 사랑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법에서 주님의 영이 빠지고 그래서 사랑이 없는 무정한 법이 될 때
법의 정신은 사라지고 법만이 남아 죽이는 법이 되고 말듯이
법은 하느님의 법도 아니고 사람을 죽이는 법이 되고 맙니다.
법은 정신이 있는 법, 주님의 영이 깃든 법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오늘 독서에서 “문자는 사람을 살리고
성령은 사람은 살립니다.”라고 얘기하며 우리가
“단죄로 이끄는 직분”이 아니라 “의로움으로 이끄는 직분”을 살라고 합니다.
죽이는 법은 알아도 살리는 법을 모른다면 슬픕니다.
단죄할 줄은 알아도 의롭게 할 줄 모른다면 불쌍합니다.
법을 아는 사람,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사랑의 법을 아는 사람,
그래서 사는 법을 알고 살릴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