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오늘 모세는 자기 백성에게 하느님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분이라고,
그러니 이런 하느님을 모신 이스라엘 민족은 위대한 민족이라고 추켜세웁니다.
그렇다면 저는 또 우리 배달 민족은 이스라엘처럼 위대한 민족입니까?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선 저와 우리 민족에게도 가까이 계셔 주십니까?
물론이고 당연합니다.
누구에게나 그리고 어느 민족에게나 가까이 계셔 주십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누가 느낍니까?
모두 느끼고 모든 민족이 느끼는 것 아닙니다.
소 닭 보듯 하는 사람 많습니다.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무덤덤합니다.
그런데 소와 닭은 왜 관계가 그렇습니까?
소가 닭을 잡아먹는 동물이라면 그럴 리 없습니다.
소는 잡아먹으려고 닭을 노려보고 닭은 소가 덮칠까 경계하며 볼 것입니다.
서로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입니다.
그렇다고 둘은 친하지도 않습니다.
관심사가 다를 뿐 아니라 호감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런 끌림이 서로 간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소 닭 보듯 관계가 바로 ‘실천적 무신론’의 관계입니다.
실천적 무신론은 존재적 무신론이 아닙니다.
존재적 무신론은 신이란 존재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천적 무신론은 신의 존재 여부에 아예 관심이 없습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곧 상관없고 관심이 없습니다.
하느님이 계시지만 내 삶 안에는 없습니다.
계시긴 하지만 저기 부산에 계신 것입니다.
여기 내게 가까이 있어도 내 삶 안에 없고,
내가 뭘 실천할 때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내 좋을 대로 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면 하고 원치 않으시면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좋으면 하고 싫으면 하지 않는 것으로 철저히 자기중심입니다
요즘의 무신론은 대개 이런 무신론입니다.
있냐 없냐 심각하게 고민한 끝에 없는 것이 아니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기에 고민조차 하지 않는 무신론이고,
그래서 존재적 무신론보다 더 나쁜 무신론이 소 닭 보듯 무신론입니다.
하느님이 아무리 가까이 계셔도 소 닭처럼 계시니
하느님의 계명도 간단히 제쳐버리겠지요?
그래서 오늘 모세가 “또한 내가 오늘 너희 앞에 내놓는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고
얘기해도 그저 웃기만 하고 코웃음 칠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하느님이 아무리 가까이 계셔도 없는 것이고,
하느님의 사랑 계명이 거미줄의 바람 같을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와 하느님은 소 닭처럼 가까운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