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오늘 사순 제4주일은 죄지은 인간이 어떻게 될까?
하느님께서는 죄지은 인간을 구원하실까? 단죄하실까?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은 죄지은 인간을 구하러 오신 걸까?
단죄하러 오신 걸까?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질문들은 하느님은 구원하시는 하느님인가? 단죄하시는 하느님인가?
하느님이 사랑이시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하느님 사전에 단죄란 없을 것이고,
그러므로 사랑의 하느님 안에서 지옥이란 없지 않겠는가? 라는 질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질문에 대한 사순 제4주일의 답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구원을 바라시고,
그래서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사순 제4주일은 답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심판과 단죄와 지옥은 실제로 없는 것입니까?
우리 교회는 이런 것들이 없다고 가르칩니까? 아니잖습니까?
그렇습니다. 우리 교회는 분명 심판과 단죄와 지옥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의 구원을 아무리 바라셔도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바로 단죄받는 것이라고
오늘 복음은 가르치고 우리 교회도 가르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구원자라는 믿음과 심판자라는 믿음 두 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심판자라고 믿는 사람은 그 믿음대로 심판받습니다.
탈렌트의 비유에서 마지막 사람은 하느님을 모진 심판자로 믿었고,
그는 자기의 믿음 대로 심판받았다고 주님은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말 우리가 믿기만 하면 됩니까?
믿는다는 것이 무엇이길래 믿기만 하면 됩니까?
믿기만 하고 정말 아무것 안 해도 되는 겁니까?
진정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진정 믿는다면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거부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완전히 맡깁니다.
그래서 빛이신 하느님께 나아갑니다.
굴이랄까 굴다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굴은 어둡고 위험합니다.
문제는 그 굴을 통과해야 신세계가 열린다는 겁니다.
희망은 굴 저편에 그 굴을 먼저 통과한 분이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분이 그 굴을 통과해 당신에게 오라고 손짓합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분이 나를 사랑하는 분이고 그래서 믿을만한 분이라면 통과하겠지요?
나를 사랑하고 나도 사랑하는 어머니가 바로 그분이라면 통과하겠지요?
오늘 복음의 주님은 당신이 바로 그분이라고 가르치시고
오늘 독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분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주님 사랑을 믿지 못하고 그 가르침도 믿지 못한다면
주님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리고 빛이신 그분보다 어둠인 세상을 더 사랑한다면
그 경우 주님은 더더욱 어쩔 수 없습니다.
주님 사랑에 대한 불신과
주님 사랑을 사랑하지 않음이 우리의 비 구원이고
그리고 그것이 바로 단죄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