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 성 토마스 축일(요한 20,24-29)
오늘은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하시는
주님의 말씀 때문에 불신앙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사도 성 토마스의 축일이다.
과연 토마스는 불신앙의 사도였을까?
아니다. 그는 단지 스스로 확인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강했을 뿐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자신의 눈으로 뵈온 후에는 그분의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보지지도 않고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며 승복하지 않았는가!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시는 예수의 말씀은
토마스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인 것이다.
토마스를 제외한 다른 10 사도들은 과연 부활하신 주님을 뵙지 않고도 그분의 부활을 믿었던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그리고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것을 이야기할 때 그들은 모두 믿지 않았었다!
그들 역시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나서야 그분의 부활이라는 엄청난 사실을,
그리고 그러한 엄청난 일을 이루시는 하느님을 제대로 믿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은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쥐시고 먼저 우리에게 은총을 주심으로서
가능하게 되는 하나의 덕임을 알 수가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믿음을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지성과 의지의 완전한 순종을 드러내고
하느님이 주신 계시에 자의(自意)로 찬동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계시헌장 5항).
먼저 하느님께서 계시하시고 그것을 우리가 자유로이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자유로이 받아들임 안에서 주관적 체험이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주관적 체험이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한편 토마스의 문제는 동료 사도들의 체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신의 주관적 체험만 강조하였지 객관적 체험을 인정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싹트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장해 나가기 때문에
객관적 체험으로 담보되지 않는 신앙은 가신성(可信性, credibilitas)을 지니지 못한다.
나주 율리아 사건은 신앙에 있어서 객관적 체험으로서의 교회의 가르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나주 율리아와 그 추종자들은 허위와 기만에 바탕을 두고 있는(모 방송사의 어떤 프로그램이
그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고 한다) 자신들의 주관적 체험만을 강조하고
교회의 가르침, 믿음의 공동체의 역사적 체험에 근거한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결국 교회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 이단이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진정한 신앙인이 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계시(성서)를 통해 전해지는 하느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우리에게 참되게 믿을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기를 청하기로 하자.
그리고 가신성을 담보해주는 교회 공동체의 객관적 체험(성전)을 받아들여야 한다.
더불어서 우리 각자의 믿음을 실천해 나가는 행위들을 통해서 우리는 삶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뵙게 되고
토마스 사도와 함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하고 외칠 수 있게 될 것이다.
오늘은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하시는
주님의 말씀 때문에 불신앙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사도 성 토마스의 축일이다.
과연 토마스는 불신앙의 사도였을까?
아니다. 그는 단지 스스로 확인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강했을 뿐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자신의 눈으로 뵈온 후에는 그분의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보지지도 않고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며 승복하지 않았는가!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하시는 예수의 말씀은
토마스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인 것이다.
토마스를 제외한 다른 10 사도들은 과연 부활하신 주님을 뵙지 않고도 그분의 부활을 믿었던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그리고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것을 이야기할 때 그들은 모두 믿지 않았었다!
그들 역시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나서야 그분의 부활이라는 엄청난 사실을,
그리고 그러한 엄청난 일을 이루시는 하느님을 제대로 믿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은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쥐시고 먼저 우리에게 은총을 주심으로서
가능하게 되는 하나의 덕임을 알 수가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믿음을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지성과 의지의 완전한 순종을 드러내고
하느님이 주신 계시에 자의(自意)로 찬동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계시헌장 5항).
먼저 하느님께서 계시하시고 그것을 우리가 자유로이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자유로이 받아들임 안에서 주관적 체험이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주관적 체험이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한편 토마스의 문제는 동료 사도들의 체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신의 주관적 체험만 강조하였지 객관적 체험을 인정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싹트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장해 나가기 때문에
객관적 체험으로 담보되지 않는 신앙은 가신성(可信性, credibilitas)을 지니지 못한다.
나주 율리아 사건은 신앙에 있어서 객관적 체험으로서의 교회의 가르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나주 율리아와 그 추종자들은 허위와 기만에 바탕을 두고 있는(모 방송사의 어떤 프로그램이
그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고 한다) 자신들의 주관적 체험만을 강조하고
교회의 가르침, 믿음의 공동체의 역사적 체험에 근거한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결국 교회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 이단이 되어버리지 않았는가!
진정한 신앙인이 되기 위하여
무엇보다도 계시(성서)를 통해 전해지는 하느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우리에게 참되게 믿을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기를 청하기로 하자.
그리고 가신성을 담보해주는 교회 공동체의 객관적 체험(성전)을 받아들여야 한다.
더불어서 우리 각자의 믿음을 실천해 나가는 행위들을 통해서 우리는 삶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뵙게 되고
토마스 사도와 함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하고 외칠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