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자식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성 김 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생각할 때 드는 생각은
<하느님은 이토록 가혹하신가?!>입니다.
할아버지가 순교하시고
아버지도 순교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사위의 밀고로 인한 것이었기에
어머니가 거의 실성할 정도로 정신적인 고통을 겪었음은 물론
살아남은 아들과 함께 유리걸식을 하며 연명을 하는 지경이 되었으니
진정 오늘 복음말씀처럼 하느님 때문에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한 겁니다.
정말 이렇게까지 되어야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인지,
주님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정말 이렇게 다 포기해야 되는지 생각게 됩니다.
아울러 주님을 위해서 거의 아무 것도 포기치 않는 우리의 삶을 반성합니다.
한 번 생각해봅니다.
지금도 개신교와 이슬람 신자들은 하느님을 위해서 술 담배를 포기합니다.
그에 비해 술 담배를 허용하기에 천주교를 믿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술 담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술 담배로 상징되는 포기를 말하는 거지요.
하느님을 믿기 위해서 작은 것 하나라도 포기해야 할 때
얻기만 하려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하느님을 믿겠는지?
작은 것 하나 포기하느니 외려 하느님을 포기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가혹하심에 대한 의문보다 더 큰 의문을 제가 가지는 것은
김대건 신부님이 우리 교회의 첫 사제이고
그리고 이렇게 큰 희생을 치루고 사제가 되었는데
하느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더 오래 양들을 위해 사목하게 하지 않으시고
어찌 그리 일찍 데려가신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이 돌아가신 것은 우리나이로 불과 26세이고,
신품을 받은 지 불과 1년 1개월만이었습니다.
이렇게 바로 데려가실 것이면 왜 그렇게 어렵게 신부가 되게 하신 겁니까?
여기에 무슨 하느님의 뜻이 있을까요?
이것은 그저 너무도 불행한 사건이기만 한 것이 아닌가요?
페레올 고 주교님은 그래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겼습니다.
"이 젊은 조선인 신부를 잃은 것은 조선교회에 거의 갚기 어려운 불행입니다.
나는 아비가 그 자식을 사랑하듯이 그를 사랑했습니다.
오직 그의 천국에서의 행복을 생각해서 그를 잃은 슬픔을 겨우 스스로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는 동포 중에서 가장 먼저 사제 성직에 오른 분으로 그것도 오늘까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열렬한 신앙과 진지하고 성실한 공경과 놀란 만한 웅변의 사람으로
한 번만이라도 그와 접촉한 교우는 곧 존경과 사랑을 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첫 사제를 이렇게 일찍 잃은 것이
당장은 한국 교회의 슬픔이고 불행이고 손실입니다.
그러나 길게 보면 이것이 한국 교회의 기틀이고 영광입니다.
저를 놓고 생각해봅니다.
제가 이렇게 오래 살며 매일 강론을 올리고
북한 복음화를 위해서도 이러저러한 일 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 닫혀 있는 북한 교회를 위해서는
제가 영웅적인 순교를 하는 것이 더 유익할 겁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멋으로 얘기하는 것, 곧
짧고 굵게 사는 것이 오래 지질하게 사는 것보다 낫다는 그런 게 아닙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주님의 말씀처럼,
순교자의 피는 교회와 믿음의 씨앗이라는 떼르뚤리아노 성인의 말처럼
한 사람의 순교는 수많은 사람의 그 수많은 믿음과 헌신을 낳습니다.
그것은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첫 사제가 하느님을 선택하지 않고
일신의 영달을 위해 배교를 선택하였다면 한국 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