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탁 드는 생각은 이런 거였습니다.
쪽박으로 바닷물을 다 퍼 담을 수 없고,
호수로는 하늘을 다 비춰 담을 수 없다.
주님의 고향 사람들은 주님께서 하시는 지혜의 말씀과,
주님께서 행하시는 기적들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말하던 사람들의 놀라움은 못마땅함으로 바뀝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은 하느님의 지혜로움과 표징을 담고 있기에 놀랍지만
자기들이 아는 예수님이 그런 놀라운 것을 했다는 것은 못마땅한 것입니다.
왜 못마땅한 것일까요?
자기와 똑같은 인간일 뿐인데,
더욱이 어렸을 때부터 줄곧 같이 지내어 잘 알고 있는 사람인데
자기들과는 차원이 다른 언변과 행적을 보이는 것에 대한 시기질투인가요?
여기서의 못마땅함은 시기질투라는 감정의 거부이기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의 부족이라는 이해의 거부입니다.
사람은 다 자기 능력만큼 이해를 합니다.
자기 이해를 넘어서는 것은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지요.
사람들은 하늘의 조화를 인간적 현상으로 이해를 하려고 합니다.
그 표현이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어디서 얻었을까 하는 표현입니다.
<얻다>라는 표현은 인간의 노력과 인간의 행위를 표현하는 거지요.
자기들은 그런 지혜가 없고 그런 기적을 행할 수 없는데
예수는 어떻게 그런 힘을 얻었을까 생각을 하면서 못 받아들이는 겁니다.
더욱이 예수는 평범한 사람인데다 천한 직업의 소유자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잣대를 예수님께 그대로 들이대며 못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200주년 성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을 합니다.
“어디서 이 사람한테 이런 지혜와 기적들이 내려올까?”
200주년 성서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지 인간이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그 힘을 받아서 지닌 것인데,
사람들은 우리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 그 힘을 얻은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인간적인 이해의 쪽박으로는 하느님의 신비를 다 담을 수 없습니다.
호수는 하늘을 다 담으려고 욕심을 부려서는 아니 되고
하늘의 한 쪽을 그저 비추겠다는 겸손을 지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