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오늘 주님은 자기 눈 속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의 티는 잘도 보는 우리의 잘못 보는 행태를 꼬집으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새겨들으면 우리 눈에 들보가 있기에
사실은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눈이 아무런 티가 없는 눈이라면 하느님을 볼 것이고,
하느님의 분유선分有善인 피조물을 아름답게 바라볼 것이고,
피조물 안에서 티가 아닌 선과 아름다움들을 볼 것입니다.
색안경을 쓰면 모든 것이 검게 보여 그것이 검다고 하듯
내가 우울하면 세상이 우울하게 보여 우울한 것만 보이고,
내게 미움이 가득하면 밉게만 보여 나쁜 것만 보게 되며,
내게 욕심이 가득해도 욕심보다 못한 나쁜 것만 보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또 다른 측면에서도 새겨볼 수 있습니다.
자기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티를 본다면
역으로 남에게 티가 있으면 내게는 들보가 있음을 알아야 하고,
남의 티가 보일 때 즉시 내게는 들보가 있구나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의 티만 보면 내게 득이 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세상은 참으로 더럽다는 더러운 느낌만 남을 뿐입니다.
그러나 남의 티를 보면서 나의 들보를 본다면
이것은 훌륭한 거울 관상이 되고, 자기 관상이 됩니다.
성녀 글라라가 얘기하듯
우리는 형제 거울에 자기를 비추어봄으로서 자기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뒷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거울로 이리저리 봐야만 보이지 않는 옆모습, 뒷모습을 봅니다.
앞뒤 옆, 사방에 있는 우리의 형제들은 우리의 거울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정면교사正面敎師인 데 비해
우리 형제들의 경우는 우리의 반면교사反面敎師들입니다.
그런데 어찌 보면 정면교사로부터 깨우침을 받는 것보다
반면교사로부터 깨우침을 받는 것이 더 어렵고 더 위대합니다.
뒤집어 볼 줄 알아야 하고,
악에서 선을 볼 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선을 관상하는 것도 훌륭하지만
악에서 선을 관상하는 것이 더 대단합니다.
하느님을 관상하는 것도 훌륭하지만
못난 인간에게서 하느님을 관상하는 것이 더 훌륭합니다.
나의 들보로 너의 티를 보지 말고
너의 티로 나의 들보를 관상하는 우리가 돼야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