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 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자기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
자기 인생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즐거움을 찾지 않고 의미를 찾습니다.
그렇다고 이 말이 삶이 즐겁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즐거움은 하나도 없는 그런 삶은 너무 살기 힘들고,
그런 삶을 또 행복한 삶이라고 할 수도 없지요.
그러므로 자신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의미만 찾고
무조건 즐거움을 배격하는 그런 사람이 아닐 것이며,
의미 없는 괴로움을 꾸역꾸역 사는 사람도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지내는 십자가 현양 축일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죽음의 형틀인 십자가를 우리는 결코 현양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 없는 십자가는 현양하지 않고 오히려 저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미가 있는 십자가만을 현양합니다.
우리의 의미이신 주님의 십자가만을 현양하고,
우리의 구원이신 주님의 십자가만을 현양하며,
우리의 생명이신 주님의 십자가만을 현양합니다.
그런데 너무도 당연하고 그래서 할 필요도 없는 이 말을 왜 하는 겁니까?
그것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 없는 십자가를 끌어안고 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주님 말씀하시는데
주님은 실종되고 십자가만 짊어진 형국입니다.
십자가는 거부하고 예수님만 따르려는 것도 문제지만
예수 없이 십자가만 끌어안는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이 자신의 고통 안에서 의미가 발생치 않는 삶을 삽니다.
무의미하게 고통을 산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이 자신의 고통 안에서 주님을 만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나의 고통, 나의 십자가가 물론 나의 것이지만
거기에 주님께서 매달려 계십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당신 운명으로 십자가에 매달리신 게 아니라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십자가에 매달리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을 보지 못하고 고통만을 본다면
십자가를 성 십자가가 아니라 저주스런 십자가로 만드는 것이며
그렇게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은 십자가를 현양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무의미하게 하고 심지어 모독하는 것입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내는 오늘
십자가 나무에 높이 달리신,
그래서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우리 주님을 우러르고 현양합니다.
그분이 우리의 생명이요 사랑이시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