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은 이야기들로 똑같은 주제를 담고 있지만, 어딘가 조금은 다르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 번째 비유. 양 백 마리에서 한 마리를 잃어버립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아 나섭니다. 하지만 잃어버린 1%를 되찾기 위해서 99%를 위험한 광야에 놓아두는 것은, 한편으로 어리석게 보입니다.
두 번째 비유. 은전 열 닢에서 한 닢을 잃어버립니다. 그러자 그 부인은 그것을 찾기 위해 온 집안을 뒤지는 고생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아마 부인에게 있어서 은전 열 닢은 전 재산이었을 것이고, 그렇기에 전 재산의 10%를 찾는 것은 노력할 만한 것입니다.
세 번째 비유. 작은아들이 떠나갑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이제나 저제나 아들이 돌아오기를 마을 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15,20) 잃어버린 50%에 아버지는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작은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아버지는 멀리서도 아들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1%, 10%, 그리고 50%. 우리가 이러한 일에 직접 관련되지 않는다면, 양 백 마리에서 한 마리는 그저 1%에 불과한, 작은 숫자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관심이 가지 않는 먼 나라에서 한 사람이 다치거나 죽은 것은, 지구 인구 몇 십억에서 한 명이 다치거나 죽은, 소수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에 나오는, 양을 치는 사람이나, 부인 그리고 아버지에게 있어서, 양 한 마리, 은전 한 닢, 아들 한 명은 1%, 10%, 50%가 아니라 100% 전부였습니다. 그렇기에 양을 치는 사람은 아흔아홉 마리 양을 그대로 놓아둔 채 잃은 양을 찾으러 나설 수 있었고, 그 부인은 시간이 아무리 걸려도 은전을 찾으려 노력할 수 있었습니다. 급기야 아버지는 큰아들이 곁에 있음에도 작은아들이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누구의 눈에도 우리 각자는 50%, 10%, 1% 혹은 더 적은 소수점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눈에 우리 각자는 100% 전부에 해당합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보기에, 우리 각자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우리 각자가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전부를 얻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만큼 하느님 보시기에 우리 각자 모두는 소중한 존재이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존재입니다.
그렇게 소중하기에, 하느님에게서 멀어졌던 우리가 다시 하느님께 되돌아가기만 한다면, 비유의 아버지가 작은아들에게 하는 것처럼, 벌이 아니라 기쁨으로 우리를 반겨주실 것입니다.
나 자신, 우리 각자, 하느님 앞에서 매우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인자로운 눈으로 지켜보고 계시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우리가 당신께 되돌아오기를 간절한 눈으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소중하게 생각해 주시듯, 우리도 우리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소중하게 다루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아무리 우리를 소중하게 생각해 주셔도, 그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신을 소중하게 대할 때 비로소, 우리 가족, 이웃 또한 소중하게 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 앞에서 소중하듯, 내 옆의 사람도 하느님 앞에서 소중하기 때문입니다.